영국이 실세 장관의 ‘과속 스캔들’을 다루는 방식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30일 16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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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총장 당시 과속’ 브래버먼 내무장관
신원 숨기려 공무원에 ‘일대일 교육’ 민원
진상조사 결정권 쥔 수낵 총리 시험대 올라
측근 비위 논란 다루는 영국의 독특한 방식

지난해 11월 리시 수낵 영국 총리와 수엘라 브래버먼 내무장관(오른쪽)이 런던을 방문한 남아프리공화국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 함께 기다리고 있다. 런던=게티 이미지
지난해 11월 리시 수낵 영국 총리와 수엘라 브래버먼 내무장관(오른쪽)이 런던을 방문한 남아프리공화국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 함께 기다리고 있다. 런던=게티 이미지
수엘라 브래버먼(43)은 속도위반을 한 검찰총장이었다. 지난해 6월 과속 통지서가 그에게 날아들었다. 그는 영국 보리스 존슨 전 총리가 2년 전 발탁한 인도계 여성 검찰 수장이었다. 과속으로 걸린 영국인에겐 두 가지 길이 있다. 단체 안전운전교육을 받거나, 벌점 3점과 함께 범칙금을 내야 한다. 벌점이 12점까지 누적되면 운전이 금지된다. 브래버먼은 안전교육을 받기로 했다.

석 달 뒤 브래버먼은 새로 출범한 리즈 트러스 내각의 내무장관에 임명됐다. 치안과 이민정책을 총괄하는 중책이었다. 그는 보수당 내 강경 보수의 아이콘이었다. 엄정한 법집행을 강조하고 불법 이민자를 르완다로 사실상 추방하는 새 이민정책에 앞장섰다.

브래버먼은 장관에 취임하자 비서실에 안전운전교육을 강사에게 일대일로 받을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통상 20여 명이 모이는 단체 교육에 갔다간 정체가 탄로 날 게 뻔했다. 하지만 직원들은 갓 취임한 장관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면서 장관이 사적인 문제 해결에 공무원을 동원하면 장관은 물론이고 해당 공무원도 처벌받는다는 윤리담당 부서의 판단을 제시했다.

수엘라 브래버먼 내무장관이 찰스3세 대관식을 하루 앞둔 5일 런던의 한 경찰서에 방문해 행사 경비 계획을 점검하고 있다. 그는 불법 시위 엄정 진압 등 강력한 공권력 집행을 강조하고 있다. 브래버먼 장관 트위터
수엘라 브래버먼 내무장관이 찰스3세 대관식을 하루 앞둔 5일 런던의 한 경찰서에 방문해 행사 경비 계획을 점검하고 있다. 그는 불법 시위 엄정 진압 등 강력한 공권력 집행을 강조하고 있다. 브래버먼 장관 트위터

브래버먼은 멈추지 않았다. ‘어공(어쩌다 공무원)’인 장관 보좌관을 시켜 안전교육 담당업체에 일대일 교육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업체 측은 온라인 수강도 가능하지만 ‘집체 교육’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고 했다. 보좌관은 화면에 얼굴이 보이지 않게 하거나 가명이라도 쓰게 해 달라고 했지만 이 역시 거부됐다. 과속 운전자들이 서로 얼굴을 드러냄으로써 수치심을 느끼는 것도 경각심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과속 딱지’ 해결이 난관에 부닥친 가운데 브래버먼에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이민정책 관련 기밀을 개인 이메일로 보수당 의원에게 보낸 사실이 들통난 것이다. 기밀 유출 논란이 일자 그는 트러스 내각이 44일 만에 무너지기 하루 전 장관에서 사퇴했다. 흠집이 나긴 했지만 브래버먼은 여전히 보수당 내 유력 주자였다. 뒤이어 집권한 리시 수낵 총리는 사퇴한 지 6일 된 그를 다시 내무장관에 기용했다.

장관실로 돌아온 브래버먼은 넉 달 넘게 끌어온 과속 문제를 마침내 매듭지었다. 안전교육을 포기하고 ‘벌점+범칙금’을 택했다. 이때만 해도 6개월 뒤 찾아올 ‘과속 스캔들’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5월 19~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한 리시 수낵 영국총리. 왼쪽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수낵 총리 트위터
5월 19~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한 리시 수낵 영국총리. 왼쪽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수낵 총리 트위터

수낵 총리는 21일 일본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폐막 기자회견에서 미간을 찌푸리며 기자들에게 물었다. “G7 회담에 대한 질문은 없나요?”

외교 성과를 알려야 할 이날 회견에서 영국 기자들은 온통 브래버먼 장관 거취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 그날 영국에선 브래버먼이 과속 사실을 숨기려 장관 지위를 이용해 공무원들에게 부당한 요구를 한 의혹이 폭로됐다. ‘장관이 사적 목적을 위해 공적인 지위를 이용하거나 그렇게 보일 만한 행동을 해선 안 된다’는 장관 윤리강령(Ministerial code) 위반이므로 진상조사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었다.

게다가 영국은 교통 법규를 어긴 고위층에게 예외를 허용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최근 찰스 3세 국왕 대관식을 집전한 영국 국교회 최고위 성직자인 캔터베리 대주교는 시속 32㎞ 구간을 40㎞로 달리다 과속으로 적발됐는데 범칙금 납부를 미루다 최근 85만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수낵 총리 역시 운전하는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가 안전벨트 미착용으로 15만원 범칙금을 낸 적이 있다.

한 실세 장관의 ‘과속 딱지’로 시작된 파문은 이제 어느덧 수낵 총리를 국정운영의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가 진상조사를 지시해야 할지를 두고 노동당과 보수당은 찬반으로 팽팽히 맞섰다. 국민은 당에 투표하고, 다수당 대표가 총리가 되는 영국에선 당내 입지가 탄탄한 핵심 참모가 총리에게 등을 돌리면 정권이 흔들린 사례가 많다.

수낵 본인이 당사자였다. ‘파티 게이트’로 위태롭던 존슨 내각이 무너진 것은 수낵이 재무장관직을 내던진 게 결정타였다. 트러스 내각 붕괴 땐 브래버먼의 내무장관 사퇴가 시발탄이었다. 브래버먼은 수낵의 주요 공약인 ‘불법 이민자 제한’을 밀어붙일 핵심 참모이자 당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거물이었다.

수낵 총리가 과속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담아 24일 브래버먼 장관에게 보낸 편지.
수낵 총리가 과속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담아 24일 브래버먼 장관에게 보낸 편지.

수낵은 브래버먼을 내치지 못했다. 24일 총리실 홈페이지에는 그가 브래버먼 장관에게 쓴 편지가 공개됐다. “당신의 해명 등을 검토한 결과 더 이상의 조사는 필요하지 않다는 윤리고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장관 윤리강령에 위반될 정도는 아니라는 게 나의 결정”이라고 했다. 앞서 내무부도 브래버먼이 수낵에게 관련 경위를 상세히 적은, 반성문 같은 편지를 공개했다.

수낵 총리의 면죄부 결정에 “나약하고 비겁하다”는 비판이 나오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논란은 잦아들고 있다. 수낵의 결정은 정치적 이해득실을 고려한 것일 테지만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국민에게 공개하는 건 흥미로운 대목이다. 의혹 당사자가 구체적으로 해명하고 인사권자가 결정하는 과정을 투명하게 드러내면 최소한 책임 소재가 분명해져 추후 정치적으로 평가하고 심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생길 때면 소모적인 정쟁 끝에 기어이 수사와 재판으로 가는 우리와는 조금 다른 문제 해결 방식이다.

#수낵#브래버먼#과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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