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 18일 일요일 새벽 미국 버지니아주(州) 폭스스톤 공원. 양복 입은 남성이 개울 위 작은 나무다리 밑에 흰 테이프를 붙인 서류 봉투를 숨겼다. 이 남성이 다리 위로 올라와 자신의 자동차로 돌아가자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두 대가 그 차 앞뒤를 가로막았다. 자동소총으로 중무장한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이 그를 향해 “간첩 혐의로 체포한다”고 외쳤다. 22년간 핵전쟁 대응 계획 같은 미국 기밀 정보 수천 건을 옛 소련과 러시아에 넘긴 이중 스파이 로버트 핸슨 전 FBI 요원(79·사진)이 덜미를 잡힌 순간이다.
미 역사상 최악의 첩보 재앙으로 불린 핸슨이 6일 감옥에서 숨졌다. 뉴욕타임스(NYT)는 “핸슨이 콜로라도주 ADX 플로렌스 연방교도소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됐으며 응급 조치에도 깨어나지 않아 사망 판정을 받았다”고 전했다.
시카고 경찰국 회계사를 거쳐 1976년 FBI 요원이 된 핸슨은 1979년 옛 소련군 정보국(GRU)에 돈을 받고 정보를 넘기면서 처음 이중 스파이가 됐다. 미국에 포섭된 옛 소련 정보원들이 이중 스파이인지 확인하는 일을 하던 그는 옛 소련에서 활동했던 러시아 국적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 명단을 넘겼다. 이들은 모두 처형됐다.
워싱턴 FBI 본부로 옮긴 핸슨은 핵전쟁 시 미국 전략과 미군 무기 개발 계획은 물론 미 정보기관 도청 네트워크를 비롯해 수많은 기밀 정보를 옛 소련과 러시아에 넘겼다. ‘라몬 가르시아’라는 가명을 쓰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서류 봉투를 약속된 장소에 숨겨 두고 사라지는 방식이었다.
이중 스파이 행각의 꼬리가 잡힌 것은 러시아 정보원에게서 러 국가보안위원회(KGB) 스파이 명단을 확보한 FBI가 핸슨이 남긴 서류 봉투 지문으로 신원을 확인하면서다.
22년간 현금과 다이아몬드 등 140만 달러(약 18억 원)를 받아 챙긴 핸슨은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플로렌스 교도소에 수감됐다. ‘깨끗한 지옥’으로 불리는 이 교도소는 독방으로만 이뤄져 탈옥이 불가능한 최고 보안등급 감옥이다. 멕시코 마약왕 ‘엘 차포’ 호아킨 구스만, 보스턴 마라톤 테러범, 9·11테러범 같은 중범죄자들이 수감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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