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중국을 배제하는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나선 가운데 유럽에 기반을 둔 글로벌 반도체 회사가 중국과 대규모 합작 투자에 나섰다. 미국의 대중(對中) 수출 규제로 생기는 중국 내 반도체 공백을 유럽 기업이 메우는 모습이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높이려는 유럽과 반도체 기술 확보가 절실한 중국의 요구가 서로 맞아떨어졌다.
8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스위스 제네바에 본사를 둔 자동차 반도체 강자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STM)와 중국 싼안광뎬(三安光電)이 전날 중국 주요 제조 허브인 충칭에 32억 달러(약 4조1800억 원) 규모 반도체 합작 벤처 설립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이 합작 벤처에는 충칭시 정부도 자금을 댄다.
새 회사는 실리콘카바이드(SiC) 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이다. 전기차, 태양광·풍력발전 부문에 쓰이는 SiC 반도체는 중국이 강점을 갖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8월 SiC 반도체를 미국 정부 승인 없이 중국에 팔 수 없는 수출 규제 대상에 올렸다. 중국이 SiC 반도체 생산설비를 증설하기로 한 것은 미 수출 규제에 대한 우회로를 찾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싼안광뎬의 사이먼 린 최고경영자(CEO)는 “(STM과의 합작 벤처가) 중국 시장에서 SiC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주요 원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장마르크 셰리 STM CEO는 성명에서 “중국은 전기차 산업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며 STM은 전기차 분야 입지를 잘 구축하고 있다”면서 “현지 파트너와 전용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를 만드는 것이 늘어나는 중국 수요에 부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SCMP는 “STM은 중국에서 약 40년간 활동해 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미중 기술 경쟁 격화에도 중국과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STM과 싼안광뎬의 충칭 합작 벤처는 미국이 대중 첨단 반도체·장비 수출을 규제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이 첨단 공정이 아닌 28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성숙 공정을 중심으로 반도체 경쟁력을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한 것이라고 SCMP는 설명했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14nm 이하 시스템반도체, 18nm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를 생산할 수 있는 장비 및 기술을 중국에 판매할 경우 허가를 받도록 해 사실상 중국 수출을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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