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휴전(1953년 7월 27일) 70주년을 맞아 10일(현지 시간)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 생 말로의 자택에서 만난 참전 용사 폴 로랑 씨(94)는 전후 처음으로 1989년 한국의 비무장지대(DMZ)를 찾았을 때를 회고하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휴전 뒤 인천에서 또 다른 전쟁터인 베트남으로 떠날 때 인천 주변 지역이 100% 파괴됐던 모습을 보면서 너무 슬펐다”면서 “그랬던 한국이 전후 정부의 통치에 여러 문제가 있었음에도 이렇게 발전에 성공했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덧붙였다.
로랑 씨는 14세 때부터 사무직 비서로 일을 시작해 20세에 군에 입대한 뒤 1949년 알제리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1951~1952년 베트남을 거쳐 1953년 4~10월 유엔군 프랑스 대대 소속으로 한국전쟁에 중사로 참전했다. 그는 주로 중공군이 남측 영토 탈환을 꾀한 중가산 전투에서 싸웠다. 당시 프랑스는 육해군 3241명을 파병해 292명(프랑스인 268명, 프랑스대대 소속 한국인 24명)이 전사했다. 현재 고령으로 남은 생존자는 29명.
24세에 부대의 최연소자로서 프랑스 남부 마르세이유를 떠나 부산에 닿았던 그는 부산 땅을 밟을 때의 벅찬 감정을 잊을 수 없다.
“미군들이 음악을 화려하게 연주하며 우리 대대 환영식을 거대하게 해줬어요. 당시엔 전쟁에 대한 두려움보단 ‘공산주의를 이겨야 한다’는 마음이 강했죠.”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로 한국전쟁 참전을 자원했던 그는 “내가 기대하고 원했던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느껴지질 않았다”며 “당시 나는 물론이고 참전을 자원한 다른 군인들도 의지가 단단했다”고 했다. 다만 중공군의 반격을 받았을 땐 매순간 ‘실수하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잠시라도 경계를 놓을 수 없었다.
로랑 씨는 같은 대대에서 군인은 아니었지만 학생 신분으로 프랑스 군인들을 돕던 당시 스무살 한국인 학생 J.K 한 씨를 그리워했다. 프랑스어 실력을 늘리고 싶어 통역 등 대대 활동을 도왔던 한 씨는 로랑 씨와 가족과 장래 꿈을 이야기하면서 힘든 시간을 함께 버텼다.
“한국 남부에 대가족을 두고 온 친구였는데 편지가 고향에 잘 전달되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동생을 엄청 예뻐해서 유난히 얘길 많이 했죠. 살아있다면 90세쯤일 텐데 과학자의 꿈은 이뤘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네요.”
로랑 씨는 당시 연애 중이던 지금의 부인 이베트 씨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용기를 잃지 않으려 했다. 큼직한 상자 안에 빼곡히 꽂힌 빛바랜 편지들을 보여주며 “나를 걱정하면서도 용기 내라는 짧은 편지를 전해준 아내가 큰 힘이 됐다”고 했다.
그는 전쟁에서 숨진 동료들을 떠올리면서 “내가 전쟁에서 살아남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서 오랜 세월이 이렇게 잘 살고, 오늘 당신을 만나 인터뷰를 하다니 정말 운이 좋다”면서 “동료들이 많이 숨져 너무나도 슬펐지만, 자유를 지키려 싸웠으니 영예롭다고 생각한다”고 도 말했다.
정전 상태가 70년 이어지고 있는 점에 대한 안타까움도 내비쳤다. 로랑 씨는 “당시 모두들 종전을 원했지만 한국도 중국도 사상자가 너무 많았다”면서 정전의 불가피했음을 얘기했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켜보는 그의 마음은 남달랐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을 소환합니다. 우크라이나는 당시 작지만 용감했던 한국하고 닮았어요. 한국이 우크라이나를 잘 지원하곤 있지만 한국을 닮은 우크라이나를 위해 더 지원을 보탰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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