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에브리싱, ‘인권 탄압’ 가리고 ‘개혁 군주’ 이미지 원해 [글로벌 포커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24일 03시 00분


사우디, 오일머니 뿌리며 ‘광폭 횡보’ 하는 이유
‘반대파 숙청 배후’ ‘인권탄압국’ 등
개인적-국가적 오명 탈피 절실
내부에선 민주화 시위 방지 총력

사우디아라비아가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추진, 이란 시리아 캐나다 등과의 잇따른 외교 정상화, 국제 스포츠 산업에 대한 막대한 투자 등으로 전 세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천문학적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인권 탄압국 이미지를 세탁하려 한다는 비판이 적지 않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전 세계적 고물가, 미중 패권 갈등 등으로 세계 최대 산유국이라는 사우디의 지정학적 이점이 이전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변화의 중심에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남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겸 총리가 있다. 그는 2018년 10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 사우디 영사관에서 사우디 정보요원들에게 잔혹하게 살해된 후 미국 등 서방 주요국으로부터 살해 배후로 지목돼 사실상 ‘기피 인물’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현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등과 만나는 사이가 됐다.

사우디 수도 리야드는 한국 부산, 이탈리아 로마와 3파전을 벌이고 있는 엑스포 유치 경쟁에서 오일머니를 기반으로 한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비교적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우디 국부펀드(PIF)는 LIV 골프 창설, LIV 골프와 미국프로골프(PGA)투어의 합병을 넘어 미국프로농구(NBA) 구단 인수 등도 추진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사우디가 ‘중동의 수니파 맹주’를 넘어 ‘국제사회의 맹주’를 노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상당 기간 국제사회의 중심에 서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 왕세자-국가 모두 ‘이미지 개선’ 절실

사우디가 국제무대에서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은 무함마드 왕세자 개인과 국가 모두 이미지 개선이 절실한 상황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반대파를 잔혹하게 탄압하는 ‘전제 군주’가 아닌 여성 인권 신장, 적대국과의 관계 개선 등을 이뤄낸 ‘개혁 군주’로 재평가받기를 원한다. 사우디 또한 석유에만 의존하는 국가 경제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

특히 산업 다각화 분야에서 이미 앞서가고 있는 이웃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을 속히 추격해야 하는 처지다. 그래야 절대 왕정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민심 이반의 싹을 애초에 잘라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2015년 부친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이 즉위한 후부터 국내외에서 내내 논란에 휩싸였다. 사우디는 초대 이븐사우드 국왕이 숨진 1953년부터 살만 국왕의 즉위까지 62년간 형제 계승 제도를 이어왔다. 이븐사우드 국왕이 여러 부인으로부터 45명의 왕자를 둔 탓에 체제 안정을 위해서라도 특정인이 아닌 여러 왕실 남성이 돌아가면서 즉위해야 한다는 암묵적 전통이 지켜졌다.

살만 국왕도 처음에는 조카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자를 왕세자로 지명했다. 불과 2년이 흐른 2017년 6월 무함마드 왕세자는 사촌 형을 감금하고 왕세자 자리를 빼앗았다. 같은 해 11월에는 왕족, 고위 인사 500여 명을 리야드 리츠칼턴 호텔에 감금한 후 숙청했다.

카슈끄지 암살은 무함마드 왕세자의 반대파 탄압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보여주는 결정판이었다. 자국 영토도 아닌 타국 영사관에서 자국민을 상대로 한 인체 훼손 살인이 벌어지자 세계가 경악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줄곧 배후설을 부인했지만 2021년 초 미 정보당국은 “살해 배후에 무함마드 왕세자가 있다”는 보고서를 공개했다.

전반적인 국민의 삶 또한 아직 선진국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알자지라 등에 따르면 2019년 기준 국민 3400만 명 중 약 20%(약 680만 명)가 빈곤층이다. 은행 계좌가 없는 사람도 700만 명에 달한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실권을 잡은 후 여성 운전 허용 등을 도입했지만 전반적인 여성 인권은 여전히 열악한 수준이다. 지난해 유명 여성 운동가 누라 빈트 사이드 알 까흐타니는 여성 인권 향상을 촉구하는 트위터를 올렸다는 이유로 무려 45년 형을 선고받았다.

석유에만 의존하는 경제 구조도 문제다. 국영 석유사 아람코는 왕실이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다. 최근 세계 스포츠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6000억 달러(약 780조 원) 규모의 국부펀드 역시 무함마드 왕세자의 ‘개인 금고’나 다름없다는 지적을 받는다. 야시르 알 루마이얀 PIF 총재는 과거 인터뷰에서 “투자의 최종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내가 아닌) 무함마드 왕세자”라고 밝혔다.

중동 전문가인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석유의 시대가 10, 20년 이상 지속될지, 아니면 조만간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어서 사우디가 산업 다각화에도 사활을 걸고 있다”고 평했다. 최근 사우디가 ‘수소 경제’를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덧붙였다.

● ‘고유가-中 밀착’에 서방 구애 쇄도
세계 최대 산유국이자 원유 수출국이라는 지위, 대(對)중국 견제를 위해 사우디가 반드시 필요한 서방 주요국의 상황 등도 사우디의 거침없는 행보를 가능케 했다.

사우디는 세계 원유 매장의 약 17.2%, 수출의 약 16.5%를 차지하고 있다. 산유국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와 미중 갈등 등에 따른 세계 공급망 교란으로 국제 유가가 치솟자 사우디의 전략적 중요성이 극대화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2020년 미 대선 과정에서 “집권하면 사우디를 국제 왕따로 만들겠다. 사우디에 대한 무기 수출을 중단하겠다”고 호기롭게 외쳤다. 자신의 지지 기반인 진보 세력이 인권 탄압에 민감한 데다 이란과의 핵 협상 복원 등을 이뤄내면 사우디산 원유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수 있다는 현실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란과의 핵 협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터졌다. 이로 인해 지난해 내내 미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8, 9%대 고공행진을 이어가자 그는 자존심을 굽히고 지난해 7월 사우디를 찾았다. 무함마드 왕세자에게 직접 원유 증산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사우디가 이끄는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같은 해 10월 감산을 발표했고 지금도 이 기조를 고수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 못지않게 인권을 중시하는 트뤼도 총리 또한 2018년 사우디가 캐나다 시민권을 가진 사우디 출신 여성 운동가 사마르 바다위를 억류하고 카슈끄지 암살까지 자행하자 사실상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나 고물가가 이어지고 2021년 기준 최대 수출국인 사우디 시장이 사라지자 캐나다 역시 백기를 들었다. 캐나다는 사우디에 운송 장비를 포함해 연 22억 캐나다달러(약 2조 원) 규모를 수출한다. 트뤼도 총리는 지난해 11월 태국 방콕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무함마드 왕세자를 만났다. 두 나라는 지난달 외교 관계 복원을 공식 선언했다.

사우디의 중국 밀착 행보는 미국의 불안감을 키웠다. 사우디는 올 3월 중국 베이징에서 ‘시아파 종주국’ 이란과 비밀 회담을 열었다. 이를 통해 2016년 사우디가 자국 내 시아파 성직자를 사형에 처한 후 7년간 단절됐던 두 나라의 외교 관계가 복원됐다. 5월에는 역시 시아파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이 장기 집권 중인 시리아와도 다시 손을 잡았다. 사우디는 시리아 내전이 발발한 후 줄곧 수니파 반군을 지원하며 외교 관계를 끊었지만 12년 만에 관계가 회복됐다.

특히 이란과의 외교 정상화가 중국 주재로 이뤄졌다는 점은 바이든 행정부에 큰 충격을 안겼다. 중동 내 중국의 세력 확장을 견제해야 하는 데다 내년 재선을 노리는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외교 정상화 주선을 주요 치적으로 내세우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윌리엄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 등은 최근 잇달아 사우디를 찾아 “이스라엘과 연내 평화협정을 체결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지난해 12월 시 주석의 사우디 방문 후 중국이 원유 거래의 위안화 결제를 강하게 추진하고 있다는 점도 미국을 움직이게 하고 있다. 미국과 사우디는 1974년 두 나라의 원유 거래 시 달러로만 결제하겠다는 ‘페트로 달러’ 체제를 확립했다. 이후 사우디는 원유 판매 대금으로 얻은 달러로 미 국채와 최신식 무기를 사들여 미 경제와 달러의 위상을 높여줬다.

이런 상황에서 ‘페트로 위안화’가 가시화하면 미국이 중국보다 우위인 패권 카드 하나가 위협을 받는다. ‘위안화 국제화’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라도 사우디의 협조가 절실하다.

● ‘아랍의 봄’ 재연 방지에 총력

사우디가 주요 스포츠산업에 대대적으로 투자하는 것은 국제사회 내 이미지 개선은 물론이고 국내 민심 이반을 잠재우려는 정치적 목적도 크다. 즉, ‘스포츠워싱(Sportswashing·스포츠를 이용한 부정적 이미지 세탁)’의 진정한 목적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는 뜻이다.

사우디는 극단주의에 가까운 엄격한 이슬람 원리주의와 오일머니로 전제 왕정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무함마드 왕세자가 상당한 잡음을 일으키며 권력을 장악한 데다 여성 인권 향상, 이란과의 외교 정상화 등 그가 추진하는 개혁에 대한 수니파 보수층의 반발이 적지 않다.

오일머니로 뿌려대던 각종 보조금 지급 같은 현금 복지 또한 언제까지 가능할지 알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2010,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체를 강타한 ‘아랍의 봄’ 같은 민주화 시위가 발발하면 무함마드 왕세자 개인의 안위를 넘어 절대 왕정의 존속이 위협받는다.

또한 사우디는 젊은 국가다. 지난해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전 인구의 63%가 30세 미만이다. 왕실 내 반대파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무함마드 왕세자가 청년층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을 공고히 하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디언은 “사우디는 ‘아랍의 봄’ 재연을 두려워한다. 스포츠는 젊은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평했다.

이에 사우디가 젊은층이 선호하는 스포츠 투자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PIF는 2021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유명 축구단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인수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카림 벤제마 등 내로라하는 축구 스타들도 거액의 연봉을 받고 각각 사우디 리그로 이적했다.

아람코는 지난해 7월 포뮬러원(F1) ‘애스턴마틴’ 팀의 2대 주주가 됐다. PIF가 아예 F1 협회 전체를 200억 달러(약 26조 원)에 인수하려 한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PIF가 NBA,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구단 등의 인수도 추진하고 있으며 특히 NBA에 관심이 많다고 전했다. 농구단은 야구단보다 선수가 적어 운영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게 든다. 한국, 미국, 일본, 중남미 일부 국가가 주로 선호하는 야구와 달리 농구의 인기는 범세계적이다.

이형민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스포츠는 투자 대비 효과를 쉽게 확인할 수 있고 국내외에서 동시에 관심을 받기도 쉽다”며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데 매우 용이하다고 진단했다.

#미스터 에브리싱#인권 탄압#개혁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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