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각종 문헌 속 역사적 사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최근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 논란과 관련해 사망한 지 100년이 넘는 근대 중국인이 느닷없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오만 방자한 청나라 말기 외교관의 상징,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입니다. 싱 대사가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며 우리 정부에 사실상 협박성 발언을 한 데 대해 윤 대통령은 비공개 국무회의에서 “싱 대사의 언행이 1880년대 (조선의) 국정을 농단한 위안스카이를 떠올리게 한다는 사람들이 많다”고 일갈했죠.
싱하이밍 대사 발언에 이어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티베트 관제 행사 참석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도종환 의원 등이 티베트 라싸에서 열린 ‘티베트 관광문화 국제박람회’에 참석했는데, 이것이 중국 정부의 티베트 점령 정당화에 이용당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싱하이밍 대사 발언과 티베트 박람회 참석 논란은 개별적인 해프닝이라기보다는 중국 ‘패권주의’ 흐름 안에서 서로 연결돼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럼 하나씩 역사를 통해 그 근거를 살펴보겠습니다.
위안스카이 ‘갑질’ 이면에 도사린 ‘중국 패권주의’
자 그럼 위안스카이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고, 그가 활동할 당시 중국은 조선에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을까요. 시계를 19세기 말 조선으로 돌려보죠.
청의 군기대신(軍機大臣)을 거쳐 훗날 중화민국 대총통, 중화제국 황제에까지 오른 위안스카이는 소싯적 학문에는 별 소질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하 구선희 <조선을 근대 식민지로 만들려 했던 중국인, 위안스카이>(역사비평·2009) 참고)
수차례 과거에 낙방한 끝에 아버지 지인(우장칭 조선파견군 사령관) 찬스로 어렵사리 관직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장칭의 막료에 불과했던 그에게 출세 길을 열어준 건 실각했던 대원군을 복귀시킨 1882년 임오군란이었습니다.
청나라가 군대를 급파해 반란 세력을 제거하는데 참여한 위안스카이는 정5품의 관직을 얻습니다. 이후 그는 조선 주둔군 3000명을 뒷배경으로 온갖 세도를 부렸죠. 본래 조선 궁궐에서는 왕을 제외하곤 누구도 가마를 탈 수 없지만 그는 예외였습니다.
정부 주최 연회에선 각국 외교사절과 달리 조선 외아문독판(현 외교부 장관)과 나란히 상석에 앉아 각국 외교관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싱하이밍 대사가 외교 관례에 맞지 않게 주재국 정부를 거침없이 비판하는 모습과 겹쳐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위안스카이 개인의 오만함에서만 비롯된 행태가 아니라 그 이면에 청 당국의 전략적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조선이 전통적으로 청의 조공국이었음을 내세워 국가주권을 기본으로 하는 근대 국제사회를 향해 조선이 자신의 속국임을 주입시키고자 한 겁니다(2017년 4월 시진핑 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양자회담에서 “사실 한국은 과거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을 일으킨 게 연상됩니다)
아편전쟁을 계기로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에 놓였던 청이 도리어 조선을 근대 식민지로 만들고자 한 겁니다. 실제로 1882년 8월 23일 청은 조선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면서 ‘조선은 청의 속방(屬邦)’이라는 조항을 넣었죠. 또 조선의 각국 주재 외교관이 청나라 현지 외교관의 지시를 받도록 하는 등 외교권 침탈까지 벌입니다.
이런 청 정부의 전략에 따라 위안스카이는 조선 당국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흔들기 위한 책략을 획책합니다. 고종 주변 중신들을 친청파로 채우는 동시에 궁궐 내 동정을 자신에게 몰래 알려주는 환관까지 심어 놓았습니다(최근 국가정보원이 중국 정부와 내통한 혐의로 내부 직원을 감찰 중인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이 중 민비 외척세력으로 위안스카이의 비호를 받은 민영준은 1894년 동학란 당시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안스카이의 뜻에 따라 청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자충수를 두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청과 위안스카이의 자충수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위안스카이는 청군을 조선에 보내더라도 일본은 병력을 보내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이는 완전한 ‘오판’이었습니다. 청과 전쟁을 벌이기 위한 빌미를 찾고 있던 일본에 청군의 한반도 진입은 일종의 호재가 된 겁니다.
위안스카이의 판단과는 달리 일본은 즉시 군대를 한반도에 상륙시키고 경복궁에 침입합니다. 그러고선 1894년 6월 23일 오전 7시 일본 군함이 아산만 앞바다에서 청나라 순양함을 공격하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합니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 및 식민지배가 본격화되는 서막이 열린 겁니다. 이로서 조선을 자신의 근대 식민지로 만들려고 한 청의 계획은 물거품이 됩니다.
중국은 언제부터 패권주의로 돌변했는가
많은 이들이 중국의 패권 추구가 미국과 더불어 G2로 부상하며 ‘중국몽(中國夢)’을 내세운 시진핑 집권 이후 본격화됐다고 말합니다. 그전까지는 덩사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 전략에 따라 이런 속내를 감췄다는 것이지요.
국제정치학자인 데이비드 강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교수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과거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조공 질서가 안정적으로 운영됐으며, 부상하는 중국과 주변국의 협력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김기혁 전 UC데이비스대 교수는 중국은 이미 19세기 후반 청나라때부터 동아시아에서 팽창주의로 돌변했다고 말합니다(이하 김기혁 <동아시아세계질서의 종막> (글항아리·2022) 참고) 당시 청은 종주국으로서 의례적인 권한만 행사할 뿐, 조공국 내정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동아시아의 조공체제 전통을 어기고 팽창주의를 추구했다는 겁니다(정치·외교적으로 독립한 조공국은 속국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중국이 일본, 러시아에 맞서 조선을 확보하기 위해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조선 내정에 깊이 개입한 게 대표적입니다. 당시 리훙장(李鴻章)은 대원군이 재집권할 경우 청의 가교로 조선이 서양 열강과 체결한 조약을 폐기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서구 열강을 끌어들여 러시아를 견제하고 한반도에서 청의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진다고 본 겁니다. 리훙장은 임오군란 직후 청군 파병과 대원군 납치를 주도하며 수도 베이징과 가까운 한반도는 자국 안보에서 ‘핵심 완충국’이라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이로부터 68년 후 6·25전쟁 때 주변 참모들의 반대에도 마오쩌둥(毛澤東)이 참전을 결정한 이유와 정확히 같습니다.)
티베트는 중국 패권주의의 압축판
민주당 의원들의 방문으로 도마에 오른 티베트는 중국 정부의 아킬레스건이자, 안보위협 요소로 꼽힙니다(이하 이동률 <중국 정부의 티베트에 대한 중국화 전략: 현황과 함의> (동북아역사논총 13호·2006) 참고)
티베트는 1950년 중국의 침공 이전까지 오랜 독립의 역사를 영위한 데다, 한족(漢族)화 된 나머지 소수민족들과는 달리 종교, 언어 독립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티베트인들의 항거는 이미 1959년 3월부터 본격화 돼 중심지인 라싸에서 벌어진 반중 시위로 8만7000명의 사망자(중국 정부 통계 기준)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티베트 불교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14세가 1000여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인도로 넘어가 1960년 망명정부를 수립하게 되죠.
이뿐이 아닙니다. 극좌 공산주의 운동이 극에 달한 1960, 70년대 문화대혁명 때는 티베트 전통문화와 종교에 대한 파괴가 절정에 이릅니다. 한때 6259곳에 달하던 불교 사원이 8곳으로 줄고, 승려 59만 명 중 11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티베트의 비극은 중국의 개혁, 개방이 본격화 된 1980년대에도 이어져 1989년 라싸 사건 30주기 때는 티베트인 400여 명이 사망하고, 3000명이 체포되는 유혈참사가 벌어져서 중국 정부가 처음으로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티베트인들의 강력한 저항에 당황한 중국 정부는 티베트 일대에 경제개발(서부개발)을 통해 티베트인들을 회유하고자 했지만, 정부에 대한 티베트들의 깊은 불신은 여전합니다. 예컨대 정부가 경제개발 명목으로 한족 이주를 적극 장려한데 대해 티베트인들은 내몽골처럼 한족화를 통해 티베트의 전통문화와 언어를 압살하려는 의도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 소수민족 정책의 근간인 ‘중화민족다원일체론(中華民族多元一體論)’은 다민족 국가의 일체화를 지향한다는 뜻으로,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의 한화(漢化)를 추구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한족이 중국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다 공산당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티베트는 단순히 중국 내정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는데 주목해야 합니다. 코소보 사태와 9.11 테러를 거치면서 중국 정부가 서방 세력이 자신들을 흔드는데 티베트 이슈를 이용한다는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은 1999년 한 회의석상에서 티베트 문제와 관련해 “서방의 일부 적대세력이 국내 분열주의 세력과 긴밀히 연계해 민족, 종교문제로 중국의 빈틈을 파고 들어 분열시키려는 정치적 음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티베트인을 비롯한 55개 중국 내 소수민족 중 하나가 조선족이라는 점에서 티베트 독립은 우리와 완전히 무관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조선족은 티베트와 같은 분리독립 움직임은 없지만,이들이 사는 중국 동북지역은 티베트처럼 상대적으로 낙후된 변경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티베트 등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정책은 동포인 조선족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민주당 일부 인사의 주장처럼 70년 전의 남의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죠.
싱하이밍-티베트 논란 이면엔 중국의 ‘갈라치기’ 전술?
싱하이밍 대사의 전랑 외교성 발언과 티베트 참석 논란은 그 1차 대상이 공교롭게도 민주당 인사들이었습니다. 미중갈등에서 비롯된 탈중국이 화두로 떠오른 상황에서 이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요.
민주당은 현 정부의 외교정책이 ‘친미 반중’이며 이것이 도리어 국익을 훼손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한-미-일 삼각동맹 강화에 불만을 품은 중국으로서는 이런 주장을 펴는 민주당을 끌어들여 일종의 ‘갈라치기’ 전술을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야로 나뉘어 지지자들이 극렬히 대립하는 한국의 정치환경을 이용해 탈중 노선을 둘러싼 여론전을 벌이고 있는 거죠.
‘하나의 중국’에 집착하는 중국이 티베트 관제 행사에 민주당 의원들을 초청한 것도 갈라치기와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중국은 티베트 이슈가 국제화되면서 이를 미국 등 서구세력이 이용하려고 든다는 의심을 갖고 있는데, 미국의 혈맹인 한국 정치인들을 여기에 끌어들인 겁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 정치인들이 티베트 관제 행사에 동원돼 ‘하나의 중국’을 지지한 것처럼 보인 데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싱하이밍 대사와 티베트 참석 논란은 구한말 위안스카이의 행태처럼 단순한 해프닝이 아닌, ‘중국 패권주의’ 행태의 흐름 속에서 읽어야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바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갖고 있는 한국이 이른바 ‘가치 외교’ 원칙에 따라 싱하이밍 대사 발언 등에 단호하게 대응해야하는 이유입니다. 강경 노선으로 중국과 갈등을 벌이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개인끼리도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지켜야하듯, 중국도 한국을 과거의 조공국이 아닌 강력한 자유 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임을 인식하도록 하자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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