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상대로 무장 반란을 일으킨 러시아 민간 용병회사 바그너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행적이 묘연하다. 암살을 피하려는 것일까. 23년째 철권통치 중인 푸틴 대통령의 정적 숙청 방식을 짚어봤다.》
‘프리고진이 숨어 있는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의 호텔방에 창문이 전혀 없다.’
지난달 23일(현지 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맞서 무장 반란을 일으킨 러시아 민간 용병회사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36시간 만에 모스크바를 향한 진군을 멈추고 잠적하자 한때 이런 소문이 돌았다.
미국 집권 민주당 소속 마크 워너 상원 정보위원장은 이러한 보도가 나오자 “정말 창문이 전혀 없는 민스크의 호텔에 묵고 있다면 이는 프리고진이 푸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라며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지난 1년 반 동안 푸틴과 충돌한 많은 러시아인들이 건물 5, 6, 7층 창문에서 불가사의하게 떨어졌다”고 말했다. 프리고진은 푸틴 대통령이 보낸 누군가에 의해 창문 밖으로 떠밀려 암살당할까봐 창문 없는 호텔방에 은신해 있을 수 있다는 추정이었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이 ‘프리고진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는 보도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푸틴 대통령의 프리고진 암살 시도를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보고 있다. 푸틴 대통령의 23년 철권통치 뒤에는 수많은 반역자들을 소리 소문 없이 숙청한 역사가 있다. 푸틴 정권은 눈엣가시들을 공개적으로 처단하기도 하지만 유독 ‘반(反)푸틴’ 인사들의 경우 자택 욕조나 건물 창문, 계단 아래 등에서 줄줄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 같은 의문사의 배후로 의심받고 있다.
● 우크라 침공 이후 약 2만 명 체포
푸틴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숙청한 대표적 사례는 보리스 옐친 대통령 시절 편법과 불법을 동원해 막대한 부를 쌓은 신흥재벌 ‘올리가르히’다. 푸틴 대통령은 전 정권에서 승승장구하던 재벌들에 대해 대대적인 사정을 벌여 감옥에 가두거나 망명시켰다. 이들이 막대한 재력으로 대권을 넘보는 등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이런 숙청은 ‘국가의 자산이 부당하게 기업인들 손에 넘어갔다’는 국민의 불만을 다독이는 효과도 있었다.
야당에 정치자금을 대며 대권 야망을 키웠던 석유기업 ‘유코스’ 사장 미하일 호도르콥스키는 탈세와 횡령 혐의로 2003년 체포돼 10년가량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는 석방 뒤 영국으로 망명해 러시아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내고 있다. 최근 프리고진의 무장 반란 때는 “러시아 정부와 맞서려면 (맞서는 자가) 악마이더라도 지원해야 한다”며 프리고진 지지 필요성을 역설했다.
푸틴의 숙청 대상이 된 경우 투옥이나 망명에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부 올리가르히는 줄줄이 의문사했다. 이 배후에 푸틴 정권이 있는지 제대로 밝혀지진 않았지만 반정권 인사들의 의문사가 반복되며 암살설에 무게가 실렸다.
의문사 형태도 다양하다. 영국으로 망명했던 보리스 베레좁스키는 2013년 런던 부촌의 자택 욕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지난해 9월엔 러시아 최대 민영 석유업체인 ‘루크오일’의 라빌 마가노프 회장이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추락사했다. 그는 지난해 2월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비판적인 자세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는 이에 비판적인 이들의 의문사가 두드러진다. 표트르 쿠체렌코 러시아 과학고등교육부 차관은 올 5월 비행기를 타고 쿠바에서 러시아로 돌아가던 중 알 수 없는 이유로 돌연 숨졌다. 그는 한 독립언론 매체에 러시아의 침공을 비난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인권감시단체 OVD-인포에 따르면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쟁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최소 1만9718명이 체포됐고 584명이 형사 소송을, 6839명이 행정 소송을 당했다. 이 단체는 “다른 많은 사람들도 당국의 위협이나 괴롭힘을 당했고 친척이 (숙청) 타깃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미국 CNN에 따르면 극단적 선택이나 의문의 사고로 숨진 러시아 거물 사업가는 지난해에만 최소 13명이다.
● ‘푸틴 홍차’와 독극물
푸틴의 암살설에선 ‘홍차’를 빼놓을 수 없다. 수많은 정적(政敵)이 숨지거나 숨질 뻔한 위기의 순간엔 홍차가 있었다. 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요원이었던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는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2006년 런던의 한 호텔에서 홍차를 마신 뒤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뒀다. 그 홍차엔 방사성물질인 폴로늄 210이 녹아 있었다. 이 물질은 청산가리보다 독성이 25만 배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군의 체첸 주민 학살을 고발한 언론인 안나 폴릿콥스카야도 2004년 차를 마신 뒤 의식을 잃었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결국 그는 2년 뒤 자택 인근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푸틴 대통령의 최대 정적으로 꼽히는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 독살 시도 때도 차가 등장한다. 나발니는 2020년 8월 시베리아 톰스크 공항에서 차를 마신 뒤 모스크바행 국내선 항공기에 올랐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독일로 긴급 이송돼 치료를 받아 간신히 살았다.
당시 독일 정부는 그에게 노비초크가 쓰였다고 발표했다. 이후 나발니는 FSB 요원을 추궁해 노비초크가 속옷의 사타구니 안쪽이 닿는 부분에 묻어 있었음을 밝혀냈다. 노비초크는 1970년대 냉전시대 소련이 개발한 화학무기로 호흡 정지, 장기 손상, 근육 경련 등을 일으킨다. 노비초크 중독으로 숨지면 심장마비에 따른 사망과 구별하기 어렵다. 가루 형태로 소지했다 액체로 만들 수 있어 추적도 쉽지 않다.
푸틴 정권은 독극물 개발의 긴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숨진 리트비넨코는 냉전 시대 정보기관 KGB 후신인 FSB가 독성물질 연구소를 비밀리에 운영하고 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921년 블라디미르 레닌이 모스크바의 ‘랩X 독극물 실험실’을 설립하며 독극물 개발 역사가 시작됐다”며 “푸틴 정권은 노비초크 등으로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여러 차례 독살한 배후에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 스탈린 시대의 재림(再臨)
푸틴 대통령의 정적 숙청 방식은 ‘죽음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말을 남긴 옛 소련의 무자비한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의 ‘리테르노예(liternoye)’ 살인을 모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리테르노예 살인은 자연사나 자살로 위장된 살인을 말한다.
작가 존 오닐과 세라 윈은 미 의회전문매체 더힐 기고에서 푸틴 대통령이 스탈린의 신화에 빠져 리테르노예 살인 같은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단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의 할아버지가 스탈린의 요리사였던 만큼 스탈린에게 친근감을 갖고 있고, 우크라이나 침공도 스탈린이 1932∼1935년 우크라이나 소농들을 체포하고 곡물을 압수해 최소 600만 명을 숨지게 한 사건을 닮았다는 설명이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FA)는 “스탈린 정권의 비밀경찰인 내무인민위원회(NKVD)를 가장 위험하게 만든 요인은 공산당이나 옛 소련 정부가 아닌 스탈린 개인에게만 충성했다는 점”이라며 FSB가 푸틴의 사조직으로 변질되는 점이 이와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스탈린 시대의 재림은 러시아 사회 일상 곳곳에서 엿보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엔 러시아가 전쟁 비판 여론을 강력히 단속하며 스탈린 시대 ‘감시사회’가 되고 있다고 미 워싱턴포스트(WP)는 보도했다. 일반인들이 식당이나 열차 안에서 개인적으로 나누는 대화는 물론이고 소셜미디어 게시물, 비공개 채팅 내용도 신고 대상이다. 한 교사는 WP에 학생과 교사가 서로를 당국에 신고하고 있다고 전했다.
푸틴 대통령의 전체주의가 더 공고해지는 분위기 속에 서방 언론은 그가 쿠데타 진압 뒤 실각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서기장과 옐친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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