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는 ‘골든파워(Golden Power)’라는 법이 있다. 2002년 제정된 이 법의 핵심은 정부가 국가 전략자산에 대해 외국인 투자자의 인수를 거부하거나 지분 매각을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법에 따라 정부는 자국 중요 사업체의 경영권이 외국 기업에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6월 16일 골든파워법을 내세워 국민 기업으로 불리는 타이어 제조업체 피렐리에 대한 중국 기업의 경영권을 박탈했다.
이탈리아, G7 중 유일하게 일대일로 참여
1872년 밀라노에서 설립된 피렐리는 2021년 기준 타이어 판매량 세계 6위인 글로벌 기업이다. 국제 자동차 프로 레이싱 대회 포뮬러1에 타이어를 독점 공급하고 있다. 피렐리의 최대주주는 2015년 지분 37%를 확보한 중국 시노캐피털이다. 피렐리의 지주사 캄핀이 보유한 주식은 14%다. 시노캐피털은 지분 인수 당시 합의를 깨고 기술을 빼가기 위해 경영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왔다. 그러자 멜로니 총리는 국가 안보상 우려가 있다면서 골든파워법을 발동해 지주사인 캄핀만 피렐리 최고경영자(CEO)를 지명할 수 있게 했다. 시노캐피털은 피렐리의 인사에 관여할 수 없게 됐고, 경영 결정 과정에서도 배제됐다.
멜로니 총리가 골든파워법을 발동한 것은 앞으로 이탈리아가 중국과 거리두기에 나서리라는 것을 예고한 신호탄이라고 볼 수 있다. 이탈리아는 2019년 3월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주요 7개국(G7) 중 유일하게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당시 주세페 콘테 총리는 미국 측 반대에도 자국을 국빈 방문한 시진핑 국가주석과 함께 에너지·항만·항공우주 등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MOU)와 일대일로 참여 협정에 서명했다. 시 주석은 콘테 총리와 함께한 일대일로 서명식에서 “베네치아 상인이자 모험가인 마르코 폴로가 옛 실크로드를 여행해 중국과 이탈리아 사이에 첫 브리지를 놓았다”며 양국 협력을 강조했다. 중국은 이탈리아 동북부 트리에스테 항구와 서북부 제노바 항구의 개발 및 투자에 참여하는 등 경제적으로 이탈리아와 밀월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나 최근 멜로니 총리는 일대일로 탈퇴를 검토하는 등 ‘탈(脫)중국’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멜로니 총리는 6월 28일 하원의원들과 만나 “일대일로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면서 “이탈리아는 일대일로에 참여하지 않고도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실상 일대일로에서 탈퇴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탈리아는 12월 22일까지 일대일로 참여 연장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그때까지 중국에 종료 의사를 통보하지 않으면 프로젝트 참여 기간이 5년간 자동 연장된다. 조르조 실리 이탈리아 외교차관은 “중국과의 일대일로 참여 협정은 구속력이 없다”면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G7·유럽 파트너 국가들과 중국의 관계를 광범위하게 숙고한 뒤 협정 철회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멜로니, 중국에 반감”
이탈리아형제들이라는 정당 대표였던 멜로니 총리는 지난해 9월 총선에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전진 이탈리아당, 마테오 살비니 의원의 동맹당 등과 중도 우파 연합을 결성해 정권을 차지하면서 이탈리아 최초 여성 총리가 됐다. 멜로니 총리는 그간 ‘강한 이탈리아’를 기치로 내걸고 반이민·반동성애·반이슬람·반중국 등을 앞세웠다.
특히 멜로니 총리는 당대표 시절부터 중국에 강경한 입장을 보여왔다. 그는 지난해 총선 직전 대만중앙통신(CNA)과 인터뷰에서 “이탈리아의 일대일로 참여는 큰 실수”라면서 “총리가 되면 일대일로에서 탈퇴하겠다”고 밝혔다. 멜로니 총리는 또 “이탈리아가 대만 문제를 중요 의제로 삼는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대만해협에서 무력충돌을 막기 위해 유럽연합(EU)도 다른 민주국가처럼 모든 외교·정치 수단을 동원해 중국에 압력을 넣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탈리아의 중국 전문가인 루도비카 메아치 브뤼셀 거버넌스스쿨 연구원은 “멜로니 총리 등 이탈리아 중도 우파 연합은 중국에 반감을 보여왔다”고 지적했다. 이어 “멜로니 총리는 이탈리아를 서방의 약한 고리로 만들지 않겠다고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동맹당 살비니 대표 역시 콘테 총리 집권 시절 부총리 겸 내무장관이면서도 일대일로 협정 서명식에 불참하는 등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심지어 당시 살비니 부총리는 시 주석이 주재한 만찬에도 불참하며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TSMC 유치 희망하는 이탈리아
이탈리아가 일대일로 탈퇴를 고려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예상보다 경제적 이익이 적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대중(對中) 수출은 2019년 130억 유로(약 18조5000억 원)에서 지난해 160억 유로(약 22조7700억 원)로 소폭 증가한 반면, 중국의 대이탈리아 수출은 같은 기간 317억 유로(약 45조1300억 원)에서 575억 유로(약 81조8600억 원)로 급증했다. 이탈리아가 상당한 손해를 본 셈이다.
반도체 산업도 핵심 이유다. 반도체 생산 능력이 부족한 이탈리아로선 주력 산업인 자동차 제조업을 활성화하려면 TSMC 등 대만 기업과 협력 강화가 필수적이다. EU 회원국은 4월 18일 총 430억 유로(약 61조2100억 원)를 투입해 EU 내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는 반도체법 시행에 합의하고 대만과의 관계 강화를 추진 중이다. 실제로 독일 정부는 TSMC와 작센주 드레스덴에 유럽 내 첫 생산 공장 건설을 협의하고 있다. 이탈리아 정부도 TSMC 공장을 유치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멜로니 총리의 친대만 정책에 따라 이탈리아와 대만의 관계는 갈수록 밀접해지고 있다. 대만 에바항공은 지난해 10월 타이베이-밀라노 항공노선을 취항했다. 대만 항공사의 밀라노 진출은 이것이 사상 처음이었다. 이탈리아와 대만 의회는 지난해 11월 친선협의회를 구성했다. 대만은 조만간 밀라노에 타이베이 경제문화대표처를 열 계획이다. 대만의 주이탈리아 대사관 격인 타이베이 경제문화대표처는 로마에 있다. 밀라노에 대표처가 문을 열면 이탈리아는 영국, 프랑스, 독일, 스위스에 이어 5번째로 2개 이상의 사실상 대만 재외공관을 운영하는 국가가 된다.
잔 마르코 센티나이오 상원 부의장과 엘레나 무렐리 상원의원 등은 최근 대만을 방문했다. 이들은 그동안 대만을 방문한 이탈리아 의원 대표단 중 최고위급이었다. 우자오셰 대만 외교부장도 6월 17일 밀라노를 비공식 방문해 파올로 포르멘티니 이탈리아 하원 외교위원회 부위원장, 이고르 이에치 하원의원 등을 만났다. 우 외교부장은 “TSMC의 투자를 유치하려는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들은 대만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면서 “유럽 국가들이 대만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상호관계가 이전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포르멘티니 부위원장은 “대만해협 현상을 유지하고 항해의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면서 “이탈리아가 과거에는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한 비전이 부족했으나, 현재 민주주의와 무역 등이 위협받는 이 지역에서 이탈리아의 역할이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대만 ‘자유시보’는 “밀라노에 대표처가 개설, 운영되면 양국의 관계 심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반도체 등 전략 분야에서 협력 가능성이 논의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中 “부정적 결과 있을 것” 경고
중국은 이탈리아가 일대일로에서 탈퇴할 움직임을 보이자 전전긍긍하고 있다. 일대일로에 참여한 국가는 대부분 개발도상국인 탓에 G7 국가이자 선진국인 이탈리아의 참여는 상당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게다가 다른 국가들이 이탈리아의 탈퇴에 동조할 경우 중국의 일대일로에 타격이 될 수도 있다.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양국이 그동안 일대일로 협정을 통해 경제·무역, 공업 제조, 청정에너지, 제3자 시장 등 각 분야의 협력에서 풍성한 성과를 얻었다”며 “양국의 관계 발전 성과가 양국과 양국 국민에게 더 많은 혜택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일대일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중국은 6월 25일부터 사흘간 류젠차오 공산당 중앙대외연락부장을 이탈리아에 파견해 설득 작업에 나섰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류 부장은 안토니오 타자니 외교장관, 이그나치오 라 루사 상원의장, 마시모 달레마 전 총리 등 이탈리아 고위 인사들을 면담하면서 일대일로 잔류를 강력하게 당부했지만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다. 심지어 중국은 이탈리아 측에 일대일로에서 탈퇴할 경우 보복할 수도 있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고 있다. 자구이더 주이탈리아 중국대사는 “이탈리아가 무모하게 협정 탈퇴를 결정한다면 부정적인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멜로니 총리는 앞으로 탈중국 노선을 강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