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戰 장기화-반란-서방 제재… 잇단 대내외 압박에 위상 흔들려
곡물 협정 파기-크림대교 보복 등
‘권위 재확인 위해 거친 행동’ 분석
러 언론 “강인한 페르소나 무너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수십 년간 강인함을 넘어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 왔지만 그의 페르소나(사회적 자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독립언론 모스크바타임스가 최근 지도력 위기에 처한 푸틴 대통령에게 내린 평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필두로 한 서방의 거센 압박, 민간 용병회사 바그너그룹의 무장 반란,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여파 등으로 ‘현대판 차르(제정 러시아 황제)’로 불렸던 그의 리더십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2014년 강제병합한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와 러시아 본토를 잇는 유일한 다리이며 ‘푸틴의 자존심’으로도 불리는 크림대교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거듭된 공격 또한 그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이에 푸틴 대통령이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대내외에 건재를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거친 행보를 보일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17일 우크라이나산 곡물의 안전한 수출을 보장했던 흑해 곡물 협정을 전 세계적 비난에도 전격 파기하고, 크림대교 공격에 대한 강력 보복을 천명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 러, 우크라 곡물 수출항에 대대적 공습
푸틴 대통령은 크림대교가 공격을 받자 즉각 대책 회의를 열고 “국방부가 보복할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며 강력 대응을 예고했다. 그는 이번 사건을 ‘테러 행위’라고 규정하며 “크림대교는 오래전부터 군사 수송에 쓰이지 않았다. 이런 교량을 폭파한 것은 명백한 범죄”라고 비난했다.
푸틴 대통령의 발언 4시간 뒤인 18일 새벽 러시아군은 이란산 무인기(드론)와 탄도미사일 등을 동원해 우크라이나의 주요 곡물 수출항인 흑해 연안의 오데사와 미콜라이우, 남동부의 전략적 요충지 헤르손과 자포리자, 동부 도네츠크 등에 공습을 가했다. 특히 오데사, 미콜라이우에서는 커다란 폭발음이 들리고 화재가 목격됐다. 이를 두고 흑해 곡물 협정 파기에 그치지 않고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푸틴 대통령의 속내를 보여줬다는 분석이 나왔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군이 방어에 어려움을 겪는 자국산 자폭 드론 ‘란체트’의 생산도 대폭 늘렸다.
러시아 일간지 네자비시마야가제타는 “크림대교 공격은 러시아로 하여금 선택의 여지가 없도록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곡물 협정 연장은 용납할 수 없는 ‘나약함’으로 여겨졌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도 “푸틴 대통령이 바그너그룹의 반란 후 자신의 권위를 재확인하려는 차원에서 협정 파기가 이뤄졌다”고 분석했다.
● 美-우크라, 협정 파기 등 비난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곡물 협정 파기, 오데사 등에 대한 공격을 한목소리로 비난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17일 기자회견에서 “식량 부족을 악화시키고 전 세계 취약계층 수백만 명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며 “이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밀, 옥수수, 콩 가격 등이 폭등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안드리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비서실장 또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산 식품에 의존하는 세계 4억 명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어 한다는 추가 증거”라며 오데사 등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을 비판했다. 주제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 역시 “러시아가 정당하지 않은 행위로 사람들의 배고픔을 무기화하고 있다”고 가세했다.
엄구호 한양대 국제대학원 러시아학과 교수는 “푸틴 대통령의 권력 기반이 흔들리고 러시아 엘리트의 권력 변동 가능성이 커졌다”라며 “푸틴 대통령을 향한 추가 쿠데타가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이어 “불안한 러시아 정치 상황에서 가장 큰 변수는 전황”이라며 전쟁 장기화로 국민의 부담이 커지고 여론 또한 나빠졌기 때문에 권력 안정을 위해서 전장(戰場)에서 푸틴 대통령의 행보가 더 거칠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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