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가’ 프랑스 사람들도 식비 줄였다[조은아의 유로노믹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8월 1일 14시 00분


유럽 물가 고공행진, 도대체 언제 멈출까

프랑스 파리의 한 대형 마트에서 소비자들이 저렴한 과일을 고르고 있다. 판매대에 ‘저렴한 가격’이라고 표시된 빨간 가격표들이 눈에 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며칠 전 프랑스 파리의 한 마트에서 다음 날 아침식사용 식재료를 샀다. 장바구니엔 네 가족이 먹을 샌드위치 재료와 과일과 야채 약간만 담겼다. 지갑을 열 부담이 느껴질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 영수증에 찍힌 액수는 거의 30유로(약 4만2000원). 외식비를 아끼려 굳이 장을 보러 갔건만 외식비 만만치 않은 돈이 나가버렸다. 바쁜 아침 샌드위치를 만드는 수고와 이 액수를 생각하면 동네 빵집에서 샌드위치 네 개를 사서 먹는 게 나을 뻔했다.

사실 1년 전만 해도 파리의 식재료 가격이 이 정도는 높게 체감되진 않았다. 그간 물가가 많이 뛰긴 뛴 것이다. 오죽하면 음식에 진심인 프랑스인들조차 사상 처음으로 외식비가 아닌 식품 소비마저 줄이기 시작했을까.

최근 기자가 프랑스 파리의 한 대형마트에서 구입한 네 가족 아침식사용 식재료. 30유로(약 4만2000원)가 들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 프랑스인들 식비 처음으로 줄였다
프랑스인들은 외식뿐 아니라 집밥 식재료 소비까지 줄이며 ‘짠물 소비’에 안간힘이다. 프랑스 통계청(INSEE)에 따르면 올 6월 식품 소비는 2021년 12월 대비 10% 감소했다. 프랑수아 지롤프 프랑스 경제전망연구소(OFCE) 경제학자는 “INSEE가 관련 통계를 집계한 1980년 이후 사상 처음으로 가정의 식품소비가 감소했다”고 밝혔다.

‘미식의 나라’ 프랑스인들이 식비마저 줄일 정도로 소비가 위축된 건 멈추지 않는 물가 고공행진 때문이다. 프랑스 월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최근 1년간 5~6%대를 이어왔다. 프랑스 물가 수준은 유럽 내에선 그나마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유럽 다른 국가들 물가는 더 높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유럽연합(EU) 회원국 간 비교를 위해 사용하는 물가지표(HICP)를 보면 6월 프랑스는 5.3% 올랐다. 하지만 EU 회원국 평균 물가 상승률은 이보다 더 높은 6.4%였다. ECB 물가안정 목표치인 2%에 미치려면 한참 멀어 보인다. 단순 비교하긴 힘들지만 미국은 이에 비하면 안정을 찾고 있다. 지난해 여름 8~9%대까지 치솟던 미국 물가상승률은 올 6월 3%대다.

프랑스 파리의 한 대형 마트 중앙에 과일 할인 코너가 마련돼 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 유럽 물가가 유독 비싼 이유
유럽 물가는 왜 유독 안정을 찾지 못하는 걸까. 소비자 가격에 포함되는 원자재 가격, 인건비가 유럽에서 유독 올랐기 때문이다.

우선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같은 유럽 지역 국가들이 ‘곡물가 폭탄’을 안았다. 세계 밀 수출 1위국인 러시아, 4위국인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며 유럽의 곡물 수급이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화하며 유럽 국가로 흐르는 가스관을 잠근 영향이 컸다.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가 높은 유럽 국가들이 가격 폭등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유럽 국가들은 최근 들어 러시아산 에너지 비중을 줄였지만 그간 의존도가 워낙 높았다. 유럽에너지규제위원회(ACER)에 따르면 전쟁 전인 2020년 국가별 가스 공급량 중 러시아산 비중은 핀란드, 라트비아가 각각 90%대, 불가리아는 70%대였다.

특히 유럽 경제의 맏형인 독일마저 가스 공급의 50%가량을 러시아산에 의존했다. 독일 소비자는 물론 기업들은 에너지 값을 감당하지 못해 경영난에 시달렸다. 결국 러시아 에너지 무기화는 독일 경제를 경기 침체 위험으로 내몰았다.

유럽 국가들의 실업률은 비교적 낮은 반면 인력 수요가 많은 영향도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고용주들이 근로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임금을 인상하게 되니 결국 식품 기업을 비롯해 전반적인 기업들의 생산비용이 올랐다”고 분석했다.

프랑스 파리의 한 대형 마트 곳곳에 할인 코너가 늘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 달라진 ECB, 금리 인상 멈추나

유럽 물가가 여전히 높으니 ECB는 계속 기준금리 인상으로 물가를 억제할 법하다. 하지만 ECB가 최근 들어 금리 인상 기조를 마무리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ECB는 7월 27일 금리를 연 4.25%로 0.25%포인트 올려 9회 연속 금리 인상을 단행하면서 시장에 예전과 다른 신호를 보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7월 30일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와 인터뷰에서 “일각에서 (다음 통화정책 회의가 열리는) 9월 마지막 기준금리 인상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며 “금리 추가 인상이나 동결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금리 인상 기조를 멈출 수 있음을 시사한 셈이다.

다만 그는 동시에 “9월이든 언제든 금리를 동결해도 반드시 (금리 동결이)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라며 “인플레이션이 목표치(2%)로 지속적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금리의 향방을 알쏭달쏭하게 제시했다. 혹시나 9월 금리가 동결돼도 이후에 여전히 물가가 높으면 금리가 추가 인상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ECB가 여전한 고물가 속에서도 금리 동결 가능성을 내비친 건 경기 침체 우려 때문으로 보인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ECB가 기준금리 동결을 고려한 이유로 유럽 자산 가격의 급락 우려가 꼽히고 있다”고 전했다.

ECB가 경기 침체 가능성을 고려해 금리를 동결하면 물가를 다스리기 더 힘들어질 수 있다. 물론 그간 금리를 9회 높인 통화정책의 효과가 앞으로 찬찬히 나타난다면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7월 곡물 수출 협정을 일방적으로 종료시켜 곡물가격이 다시 급등했고, 폭염과 폭우 등 세계적 이상기후마저 작황을 어렵게 하고 있다. 물가 불안 요인이 이처럼 끝없이 터지는데 경기 침체 위험도 도사리고 있어 ECB의 고뇌가 여느 때보다도 커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에서 불거지는 경제 이슈가 부쩍 늘었습니다. 경제 분야 취재 경험과 유럽 특파원으로 접하는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 유럽 경제를 풀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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