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 미-이란 관계, 개선 조짐 있지만 갈길 멀어
갈등과 불신 뿌리 깊고, 근본 문제 해결되지 않아
현재는 양측 대화 모멘텀도 없어
‘이란 시장 진출’도 미국과 관계 개선 없이 어려워
멀게 느껴지지만 우리와 뗄 수 없는 중동. 그 생생한 현장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정치, 경제, 자원, 종교, 역사, 문화가 얽혀 있는 갈등과 변화의 ‘핫스팟’ 중동의 모습을 쉽고, 재미있게 또 의미를 담아 알려 드리겠습니다.
카이로특파원, 국제부 차장, 카타르의 싱크탱크 아랍조사정책연구원(ACRPS)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중동을 취재했습니다. 단행본 <중동 라이벌리즘>과 <있는 그대로 카타르>를 펴냈습니다.
루홀라 호메이니 이란 초대 국가 최고 지도자(1902~1989년)는 재임 시절(1979년 12월~1989년 6월) 미국을 ‘큰 사탄’으로 불렀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2001년 1월~2009년 1월 재임)은 2002년 연두교서에서 북한, 이라크와 함께 이란을 ‘악의 축’이라고 비판했다.
큰 사탄과 악의 축은 지금도 미국과 이란의 적대적인 관계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미국과 이란은 한 번도 전쟁을 치른 적이 없다. 하지만 두 나라는 1979년 2월 이란의 이슬람 성직자들이 중심이 돼 친미, 세속주의를 지향했던 팔레비 왕정을 무너뜨린 ‘이란 혁명’을 계기로 단교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로를 향해 강한 반감이 담긴 메시지를 쏟아냈다.
큰 사탄과 악의 축은 이란과 미국이 서로를 얼마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레토릭.
이런 미국과 이란 관계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최근 두 나라는 자국에 수감돼 있는 상대방 국적자를 맞교환하기로 했다. 또 미국은 대이란 경제제재 때문에 한국에 동결돼 있던 70억 달러(약 9조3100억 원) 규모의 이란 원유 결제 대금의 이체를 허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이란은 핵무기 개발에서 핵심 과정인 우라늄 농축 작업 속도도 늦추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과연 미국과 이란 사이에 불고 있는 훈풍은 계속될 수 있을까.
● 뿌리 깊은 앙숙 관계 – 이란의 도발
문제는 간단치 않다. 미국과 이란 간 불신은 뿌리가 깊다. 또 쉽게 치유되기도 힘들다. 두 나라 간 갈등은 4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란 혁명 세력은 자신들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팔레비 왕의 소환 요청을 미국에 했다. 하지만 미국은 거부했다. 미-이란 갈등의 본격적인 시발점이다.
이 과정에서 1979년 11월 혁명 세력을 지지하는 과격파 시위대가 ‘팔레비 왕의 송환’을 외치며 반미 시위를 벌이던 중 테헤란의 주이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한다. 그리고 이란에 거주 중이던 미국 외교관과 국민 52명은 대사관 건물에 억류됐다. 이들은 1981년 1월에서야 풀려났다. 444일간 이란 혁명 세력이 미국인 집단으로 억류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명의 미국인을 이렇게 긴 기간 동안 억류한 나라나 조직은 없다. 지금도 이란은 테헤란의 구 미국 대사관 건물을 ‘외세에 대항했던 역사’를 자랑하는 기념관으로 활용 중이다.
이란 전문가인 구기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는 “당시 이란 혁명 세력의 조치는 미국의 뿌리 깊은 ‘이란 트라우마’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며 “직접적인 무력 충돌이 없었는데도 미국이 이란을 극도로 불편하게 생각하는 데는 444일 간의 자국민 억류 사건이 결정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1983년에는 레바논의 친이란, 시아파 무장 정치단체 헤즈볼라가 수도 베이루트의 미 해병대 사령부 건물을 공격했다. 미군 241명이 숨졌다. 이란이 직접 감행한 공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은 다시 한번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다. 또 이란에 대한 반감을 더욱 키우게 됐다.
● 뿌리 깊은 앙숙 관계 – 미국의 압박
미국도 만만치 않다. 미국은 이란 혁명 세력이 신정공화정을 출범시킨 뒤 다양한 직‧간접 경제제재로 이란을 압박했다. 1980년부터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친미 아랍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함께 이라크를 지원했다.
최악의 시기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임(2017년 1월~2021년 1월) 시절이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2009년 1월~2017년 1월) 잠시 개선됐던 이란과의 관계를 다시 냉각시켰다. 오바마 행정부가 최대 성과 중 하나로 내세웠던 이란과의 핵 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 계획·2015년 7월 타결·이란이 우라늄 농축 등 핵무기 관련 작업을 중단하면 단계적으로 경제제재를 푼다는 내용)를 2018년 5월 백지화한 것.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러시아, 중국 등 이른바 국제사회의 주요국이 이란과 맺은 합의에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탈퇴한 것이다. 세부 내용이 지나치게 이란에 유리하고, 이란이 실제 핵무기 개발을 포기했는지 검증하기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당연히 이란은 반발했다. 국제사회에서도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이 강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란산 원유의 수입을 금지했다. 나아가, 이란에서 ‘정부 위의 정부’로 통하며 최고지도자의 친위 군사조직인 혁명수비대(IRGC)를 테러단체로 지정했다.
2020년 1월에는 혁명수비대 내 최고 엘리트 부대로 해외 작전과 특수전, 나아가 이란 인근 국가를 대상으로 한 비공식 외교 업무도 담당하는 쿠드스군의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무인기(드론)로 사살했다. 쿠드스는 아랍어로 예루살렘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은 히브리어(이스라엘의 언어)다. 쿠드스군에는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 지지부진한 핵 협상
현재도 미-이란 관계 개선의 확실한 돌파구가 될 수 있을 만한 모멘텀은 약하다.
일단 조 바이든 대통령이 2021년 1월 취임한 뒤 재개된 미-이란 핵 협상이 답보 상태다. 양측은 수차례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유의미한 진전은 없었다. 최근에는 물밑 접촉도 거의 안 이뤄지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외교 소식통은 “바이든 행정부 출범 직후에는 미-이란 핵 협상이 비교적 활발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현재는 중단된 상태로 봐야 한다”며 “재개된다는 시그널도 지금은 없다”고 말했다.
이란 입장에서는 경제제재를 풀어야 하는 만큼 핵 합의를 다시 이뤄낼 필요가 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 때 갑자기 핵 합의가 엎어진 트라우마가 있다. 어설픈 복원으로는 국내 보수파를 설득하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핵 합의 복원 과정에서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요구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또 확실한 이행 보장을 기대한다. 트럼프가 내년 미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할 가능성이 높고, 실제 당선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미국 입장에서도 이란의 강화된 요구는 부담되고 당연히 검토해야할 사항도 많을 수밖에 없다. 협상이 다시 시작돼도 입장 조율이 쉽지 않을 것이란 뜻이다.
2015년 오바마 행정부 시절 핵 합의가 타결될 때와 국제사회의 분위기가 크게 다르다는 것도 악재다. 당시에는 주요국 간 공조가 비교적 잘 이뤄졌다. 지금은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거칠어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러시아와 서방 간 갈등도 심각하다. 또 이란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핵 합의를 파기한 뒤 러시아,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 이란에 대한 근본적인 우려도 여전
미국과 다른 중동 나라들이 우려하는 이란의 근본적인 외교안보 전략도 여전하다.
아직 이란은 핵무기가 없다. 하지만 올해 5월 기준 핵폭탄 2개를 만들 수 있는 수준의 고농축 우라늄(약 114kg)을 보유하고 있다. 또 사정거리 2000km 수준의 탄도미사일도 대량 보유하고 있다. 군사용 드론 기술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러시아가 수입해 사용할 정도로 우수하다.
무엇보다, 시아파 종주국인 것을 앞세워 △헤즈볼라(레바논) △카타입헤즈볼라(이라크) △후티 반군(예멘) △하마스(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등 중동 내 친이란, 시아파(하마스는 수니파이지만 이란과 가까움) 무장 정치단체들을 활용한 무력 도발과 내부 정치 개입을 추진하는 ‘시아벨트 전략’도 여전하다.
시아벨트 전략은 시아파 인구가 많고 정세가 불안한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예멘 등의 친이란, 시아파 무장 정치단체들을 이용해 해당 나라에서 유리한 정책과 전략이 추진하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그리고 무장 정치단체들을 이용해 이스라엘, 사우디, 아랍에미리트(UAE) 같은 ‘적대국’을 공격한다.
‘아랍의 맹주’이며 중동의 대표적 친미 국가인 사우디와 UAE는 이란의 드론에 원유 생산 시설과 공항이 공격받는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스라엘은 헤즈볼라와 하마스의 도발을 계속 경험해 왔다.
다만, 올해 3월 중국 중재로 이란과 사우디는 7년 만에 외교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 이로 인해 이란의 시아벨트 전략이 이전보다 약화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당시 사우디 싱크탱크인 킹파이잘 이슬람연구센터의 조셉 케시시안 수석연구위원은 “사우디와 이란은 2년간 이번 협상을 진행했고, 이란의 헤즈볼라와 후티 반군 등에 대한 지원 문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우디와 이란 간의 협상 때 시아벨트 문제가 비중 있게 거론됐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란이 시아벨트 전략을 크게 수정하거나 폐기하는 건 힘들다. 핵무기와 달리 이미 완성됐고, 성과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구 연구교수는 “이란은 시아벨트를 자국 안보의 핵심으로 생각한다”며 “이를 포기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 ‘이란 특수’도 아직 먼 이야기
결론적으로 미-이란 관계가 언제, 어떻게 본격적으로 개선될지는 불투명하다. 또 뚜렷한 개선 모멘텀도 없다.
물론 미국 대통령 선거(2024년), 이란의 총선(2024년)과 대통령 선거(2025년)가 변화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누구도 쉽게 과정과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기대되는 거대한 시장, 이란’이 언제, 어떻게 열릴 지도 아직 미지수인 것.
세계은행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이란 인구는 약 8855만 명. 중동에서 이집트(약 1억1100만 명) 다음으로 많다. 중동권에서 인력 수준도 가장 우수한 편이라는 평가가 많다. 원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은 각각 세계 3위와 2위다. 다른 중동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대규모 식량 생산이 가능한 비옥한 토지도 많다. 2015년 7월 핵 합의가 타결됐을 때 한국은 물론이고 전세계가 이란을 주목했던 이유다.
한국의 경우 전통적으로 건설사들이 중동에서 큰 성과를 냈다. 특히 이란에서는 드라마를 중심으로 K콘텐츠의 인기가 상당하다. 삼성전자와 LG전자도 이란에서 강세를 보여왔다.
하지만 미국의 경제제재가 확실히 해결되지 않는 이상 이란은 리스크가 너무 큰 시장이다. 미국, 나아가 글로벌 시장을 상대로 활동하는 기업들에게는 이란 진출은 언제든 미국의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국내 주요 대기업과 중견기업 중 ‘미국 수출’과 ‘미국 기업과의 거래’에서 자유로운 곳은 많지 않다.
삼성전자 중동지역 법인장(상무) 출신으로 테헤란 근무 경험도 있는 이창섭 전경련 자문위원은 “최근 미-이란 관계에 다소 변화가 있지만 이란 시장만 바라보는 기업이 아닌 이상 여전히 이란 진출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며 “한국 기업들의 본격적인 이란 진출은 결국 미국의 대이란 경제제재가 해결되어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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