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프리고진 공개 처형으로 ‘배신하면 죽음’ 경고

  • 주간동아
  • 입력 2023년 9월 2일 10시 17분


무장반란 일으킨 프리고진 전용기에 폭탄 설치해 암살한 듯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 [바그너그룹 제공]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 [바그너그룹 제공]
“프리고진은 현재 일종의 데드맨 워킹(dead man walking)이다. 그가 몇 달 뒤에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다면 나는 그 사실에 매우 놀랄 것이다.”

미국 정치컨설팅업체 유라시아그룹의 이언 브레머 회장이 무장반란을 일으켰던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운명을 전망한 내용이다. ‘데드맨 워킹’이란 사형수가 형장으로 이동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곧 죽을 운명인 사람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브레머 회장의 예측처럼 프리고진은 사실상 공개 처형됐다. 그는 8월 23일 오후 6시 20분쯤(현지 시간) 자신의 전용기를 타고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던 중 트베르 지역 쿠젠키노 마을 인근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쿠젠키노는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300㎞ 떨어진 곳이다.

프리고진은 바그너그룹 공동 설립자이자 2인자인 드미트리 우트킨을 비롯해 간부 6명, 승무원 3명과 함께 전용기에서 사망했다. 항공기 경로를 추적하는 웹 사이트 플라이트레이더24는 전용기가 고도 8.5㎞를 날아가다가 갑자기 수직으로 2.4㎞를 하강했다고 밝혔다. 당시 하강에 걸린 시간은 30초를 넘기지 않았다. 친(親)바그너그룹 성향의 텔레그램 채널 ‘그레이존’이 올린 동영상을 보면 전용기는 연기를 내뿜으며 빙글빙글 돌다가 빠르게 수직으로 떨어졌다.

심복에서 반란군 수장으로


러시아연방 수사위원회 요원들이 프리고진의 전용기가 추락한 현장을 조사하고 있다. [러시아연방 수사위원회 제공]
러시아연방 수사위원회 요원들이 프리고진의 전용기가 추락한 현장을 조사하고 있다. [러시아연방 수사위원회 제공]
프리고진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심복 중 심복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프리고진과 30여 년간 인연을 맺어왔다. 푸틴 대통령 역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이다. 프리고진은 2014년 스페츠나츠 지휘관(중령) 출신인 우트킨과 바그너그룹을 공동 설립했다. 바그너그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침공해 강제 병합할 때 상당한 역할을 했다. 시리아, 모잠비크, 리비아, 중앙아프리카 등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인권 유린과 잔학 행위를 자행하며 악명을 얻기도 했다. 러시아가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때도 러시아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바그너그룹은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의 전략요충지 바흐무트를 장악하는 등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러시아 국방부와 군 지휘부가 탄약·보급품을 지원하지 않았고, 프리고진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결국 프리고진은 6월 23일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 등 러시아 군 수뇌부의 처벌을 요구하며 무장반란을 일으켰다. 바그너그룹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점령지에서 출발해 1000㎞를 파죽지세로 전진했고, 36시간 만에 모스크바를 200㎞ 앞둔 지점까지 진출했다. 당시 푸틴 대통령은 큰 위협을 느꼈는지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을 중재자로 내세워 프리고진이 회군해 벨라루스로 망명하는 조건으로 무장반란에 면책 조치를 내렸다.

“프리고진 반란, 푸틴에 굴욕 줘”


2017년 2월 26일 러시아 국민들이 모스크바에서 보리스 넴초프 전 총리를 추모하며 행진하고 있다. [뉴시스]
2017년 2월 26일 러시아 국민들이 모스크바에서 보리스 넴초프 전 총리를 추모하며 행진하고 있다. [뉴시스]
푸틴 대통령은 자신에게 굴욕감을 준 배신자 프리고진을 살려둘 독재자가 아니다. 실제로 2000년 푸틴 집권 이후 지금까지 그에게 비판의 목소리를 내거나 반기를 드는 등 권력에 도전했던 정적과 올리가르히(신흥 재벌), 전직 정보요원, 언론인 등이 사망한 사례가 최소 40여 건이다. 이들 죽음의 배후에는 항상 푸틴 대통령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프리고진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에도 서방에선 프리고진이 암살당했고, 배후는 푸틴 대통령이라는 추정이 나오고 있다. 브레머 회장은 “푸틴은 프리고진이 두 달 동안 활보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프리고진이 훨씬 취약한 상황이 될 때까지 시간을 갖고 기다렸다”면서 “이는 푸틴이 얼마나 극도로 계산된 인물인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리처드 디어러브 전 영국 해외정보국(MI6) 국장도 “프리고진이 탄 전용기의 추락은 단순 사고가 아니다”라며 “푸틴이 자신의 권력 기반에 도전한 상대에게 보복했다”고 지적했다.

타티아나 스타노바야 카네기 러시아·유라시아센터 선임연구원은 “비행기 추락 원인이 무엇이든 모든 사람이 이를 크렘린궁의 복수와 보복으로 볼 것”이라며 “프리고진은 용서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마이클 맥폴 전 주러시아 미국대사도 “프리고진의 반란이 푸틴에게 굴욕을 안겼다”며 “푸틴이 반란에 대해 보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프리고진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심지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내가 프리고진이라면 무엇을 탈지 조심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며 “러시아에서 푸틴 대통령이 배후에 있지 않은 일은 별로 없다”고 지적했다.

프리고진이 ‘비행기 추락’이라는 공개적인 방식으로 죽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 러시아에서 벌어진 의문사들은 △독극물에 의한 독살 △호텔과 병원 등에서 추락사 △총격 △자살 등이었다. 이 중 가장 충격을 준 죽음은 푸틴 대통령의 정적이자 대선 주자였던 보리스 넴초프 전 부총리가 2015년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괴한들의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다. 넴초프 전 부총리는 한때 푸틴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이후 갈라져 야당 길을 걸었다. 푸틴 대통령의 독재에 반대해온 유력 대선 주자 넴초프 전 부총리의 죽음은 야당 정치인들에게 던진, ‘권력에 도전하지 말라’는 공개 경고였다. 프리고진의 죽음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서방 언론들은 미국과 영국 정보·군사 전문가들의 분석을 종합해 기내에 설치된 폭탄이 폭발해 암살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항공기 뒤쪽 화장실 근처에 설치된 폭탄 1~2개가 터졌을 것”이라며 “비행기 잔해가 널리 흩어진 점에서 볼 때 추락은 기계적 결함이 아닌, 폭발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비행기 폭발로 인한 사망은 총기에 의한 것보다 더욱 충격적이다. 존 포맨 전 MI6 요원은 “푸틴은 자신에 맞서려는 누구에게든 으스스한 효과를 남겼다”고 지적했다. 무장반란을 시도했을 때부터 프리고진의 최후가 어느 정도 예상됐지만, 적나라한 추락 영상까지 공개되면서 러시아 ‘권력 엘리트들’은 상당한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권력 엘리트들은 실로비키와 올리가르히를 말한다. 러시아어로 ‘제복을 입은 남자들’을 뜻하는 실로비키는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후신인 연방보안국(FSB)을 비롯해 정보기관, 군, 경찰 출신 인사들로 이뤄졌다. 올리가르히는 소련 붕괴 이후 국영자산을 헐값에 사들이며 부를 축적한 신흥 재벌이다.

푸틴 대통령이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러시아의 권력 엘리트들에게 ‘충성만이 살길’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캐서린 스토너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정치학 교수는 “러시아 권력 엘리트들에게 ‘나에게 도전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푸틴 대통령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 침공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만큼 당장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됐다. 자신을 배신한 프리고진을 단죄함으로써 러시아 권력 엘리트들에게 충성을 요구한 셈이다.

뉴욕타임스는 “프리고진의 사망은 크렘린궁이 ‘불충’만큼은 단죄를 피할 수 없다는 신호를 보낸 것일 수 있다”면서 “이는 푸틴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 유지를 최우선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영국 ‘더 타임스’도 “러시아가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있다는 점과 프리고진의 사망이 무관치 않다”며 “푸틴 대통령의 의도는 러시아 권력 엘리트를 향해 경고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푸틴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였던 압바스 갈랴모프 러시아 정치 컨설턴트는 “지금 당장 푸틴의 우선순위는 권력 유지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은 “무장반란 두 달 만에 프리고진을 공개적으로 제거한 것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푸틴이 러시아 엘리트층에게 보내는 신호”라면서 “그 신호는 배신하면 곧 죽음이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푸틴 집권 12년 연장되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모스크바 크렘림궁에서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크렘린궁 제공]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모스크바 크렘림궁에서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크렘린궁 제공]
올해 71세인 푸틴 대통령은 2000~2008년(3·4대), 2012~2018년(6대)을 거쳐 2018년부터 러시아 7대 대통령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2020년 헌법을 고쳐 임기를 ‘중임 2회’로 제한했지만, 개정된 헌법은 차기 대통령부터 적용된다는 단서를 달아 법 적용을 피했다. 내년 3월 17일(현지 시간) 실시될 차기 대선에서 당선하면 푸틴 대통령은 연임을 통해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12년을 더 집권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종신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과거 소련과 러시아에서 발생한 쿠데타는 권력의 종말로 이어졌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과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은 쿠데타를 진압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사임해야 했다. 러시아 국민은 강한 지도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은 부하들의 무한 충성심을 이끌어내고자 배신자를 가차 없이 숙청한 것이다. 물론 푸틴 대통령의 정치적 생명은 러시아 국민에게 달렸다. 이 사실을 잘 아는 푸틴 대통령은 국민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 권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 분명하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05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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