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밀월 시대’ 돌입한 북한과 러시아
광복 후 소련 절대 의존하던 북한
중소 분쟁 땐 줄타기로 실리 챙겨
1990년 ‘한소 수교’로 관계 최악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3일 무기 거래를 비롯한 군사 기술 협력을 논의한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과 러시아의 ‘신(新)밀월 관계’가 본격화되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따른 유엔 제재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서방 제재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양국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러시아가 중국보다 더 큰 북한 조력자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역사적으로 북-러 관계는 ‘혈맹(血盟)’ 같은 우호 관계를 유지하다가 단교(斷交) 직전까지 치닫는 등 부침을 겪어왔다. 향후 양국 전략 목표와 지정학적 환경 변화 등에 따라 북-러 관계 훈풍이 지속 가능할지 결정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 ‘혈맹’에서 ‘단교’ 위기까지
1945년 8월 15일 소련(현 러시아)은 1941년 소련군 제88여단에 배속된 김일성을 지도자로 세울 계획을 세우고 북한에 진주하면서 1948년 9월 김일성 정권 수립을 도왔다. 이 시기 소련은 북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1950년 6·25전쟁 직전 소련 최고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허락하고 인민군 10개 사단을 무장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했다. 다만 소련은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기 위해 소련군을 파병하지는 않았다.
소련의 이 같은 소극적인 전쟁 대응과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 취임 이후 벌어진 ‘스탈린 격하 운동’은 북한의 대(對)소련 정책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중국 마오쩌둥이 흐루쇼푸 노선을 수정주의라고 비난하며 이념 갈등이 빚어지면서 중소 분쟁의 막이 올랐다. 이는 1960년대 공산 진영 내부 패권 경쟁으로 비화했고 1969년 중소 국경 무력 분쟁으로 정점을 찍었다.
격한 중소 갈등의 1960년대 북한은 정치적 자주와 주체사상을 내세우면서 소련 편향적 대외 정책에서 벗어나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등(等)거리 외교를 펼치며 실리를 챙겼다. 북한은 중소 분쟁에 대해 명확하게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으면서 양국과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이 포함된 우호조약을 맺었다. 이 같은 줄타기 외교 노선은 1980년대까지 유지했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이달 발간한 보고서에서 “전통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북한의 관심은 주로 대중국 정책에서 파생된 것”이라며 “중국에서 더 많은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러시아와의 협상을 지렛대로 활용해 왔다”고 분석했다.
1980년대 후반 소련이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고 노태우 정부가 북방외교 정책을 추진하면서 소련과 한국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소련은 북한 반대에도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참가했고 1990년 한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이후 10년간 북한과 소련의 실질적인 교류는 중단됐고 양국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소련 붕괴 후 1995년 러시아는 북한과의 조소 우호조약 파기를 선언하는 등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북한은 본격적으로 핵 개발에 나섰다.
● 푸틴 취임 후 냉각기 해소
2000년 푸틴 대통령이 취임하고 평양을 방문하면서 북-러 관계에는 다시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국제무대에서 미국 독주를 견제하고 한반도 영향력 확대를 꾀한 푸틴 대통령과 외교적인 고립에서 탈피하고 경제 재건이라는 실리를 챙기겠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푸틴 대통령은 그해 7월 러시아(옛 소련 포함)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 단독 회담했다. 이후 김정일은 세 차례 러시아를 방문해 정상회담을 갖고 안보, 경제, 과학기술 협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2006년 10월 북한이 1차 핵실험을 강행하자 러시아는 이를 비난하면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를 촉구했다. 러시아는 2006년부터 2017년까지 북한 비핵화와 관련한 10차례 유엔 대북 제재 결의를 채택하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반대표를 던지지 않았다. 2011년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에도 북-러 관계는 소강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던 2019년 4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직접 찾아 푸틴 대통령에게 다급한 손길을 내밀었다. 두 달 전인 그해 2월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종료돼 체면을 구긴 김 위원장은 실패를 만회할 우군이 절실했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당시 김정은은 트럼프와의 정상회담 실패 충격으로 휘청였으며 외교적 생명줄을 찾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양국은 더욱 밀착했다. 북한은 그해 3월 유엔 총회에서 ‘러시아군 철수 요구 결의안’에 시리아 벨라루스 같은 ‘러시아 맹방’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다. 이어 5월 러시아도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에 대한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강화에 반대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 “군사 넘어 철도-노동 협력 전망”
2019년 북-러 정상회담은 뚜렷한 소득 없이 끝났지만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 관계는 군사 협력을 넘어 전략적 관계로 바뀔 것이라고 내다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러시아 관영 인테르팍스통신 등에 따르면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기간 군사 외에도 경제, 관광 분야 등의 협력을 논의했다. 또 푸틴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북한 초청을 수락했고 다음 달 초 외교장관 회담을 열기로 했다.
북한은 이른바 ‘5대 국방 과업’ 가운데 수중 핵무기 발사가 가능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능력 등의 확보를 위해 러시아 군사 기술이 필요하다. 또 북-러 밀착을 지렛대 삼아 중국의 경제 협력 등을 압박할 수 있다. 러시아로서도 포탄 같은 재래식 무기를 지원받아 탄약고를 채우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역사적으로 북한과 러시아가 지금처럼 상호 이해관계가 일치한 적이 없었다”고 진단했다. 임 교수는 이어 “두 나라가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을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구체화하려고 시도할 것”이라며 “북한은 탄약 지원을 확실히 할 것이고 러시아도 북한이 원하는 군사기술을 이전한 뒤 광범위한 경제 협력이 시작될 것 같다”고 전망했다.
양국 연결 철도와 러시아의 나진항 이용 활성화도 주요 관심사다. 양국은 북한 나선시 나진항에서 러시아 연해주 하산까지 철도 수송 확대 방안을 논의했다. 러시아는 2008∼2014년 하산과 나진항을 잇는 철도 54km 구간을 개·보수하고 시베리아산 석탄을 운송해 중국 등으로 수출했으나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북한 국경이 봉쇄돼 운행이 중단됐다. 알렉산드르 코즐로프 러시아 천연자원부 장관은 김 위원장 방러 당시 “하산역과 나진항을 잇는 철도는 (양국 관계) 미래이며 (계속) 발전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북한이 유엔 대북 제재에 아랑곳 않고 숙련된 노동력을 러시아에 공급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북한은 해외 노동자 파견을 통한 외화벌이가 절실하고 러시아는 노동자 부족을 해결해야 한다. 박정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료된 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땅을 재건하기 위해 북한 노동자를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며 “북한은 중국 협력을 끌어내는 협상 카드로, 러시아는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수단으로 전략적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진다”고 설명했다.
다만 양국 관계는 전략적 이해에 따라 역사적으로 롤러코스터를 탄 만큼 향후 세계 질서 변화에 따른 유동성은 여전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임 교수는 “역사적으로 양국 관계는 상황에 따라서 부침이 있었다”며 “전략적 밀착 수준이 이전과는 다르지만 국제사회 항의와 제재에 따라 속도 조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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