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대선을 앞두고 미국 공화당은 후보 선출 작업에 한창입니다. 그런데 정작 당 대선 후보를 뽑기 위한 TV토론회에 가장 유력한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불참했습니다. 여론조사 압도적 1위인 자신이 다른 후보와 같은 자리에서 경쟁하는 게 불공정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물론 트럼프 없는 TV토론회에서도 화두는 여전히 트럼프였습니다. 다른 후보들은 트럼프의 열혈 지지 세력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눈치를 보기 바빴습니다. 지난달 열린 첫 TV토론회에서 ‘트럼프가 유죄 판결을 받고도 여전히 최종 후보로 지명된다면 그를 지지하겠느냐’는 질문에 8명의 후보 중 6명이 찬성 의사를 밝혔습니다.
38세 최연소 후보인 인도계 기업가 비벡 라마스와미는 “트럼프 전 대통령은 21세기 최고의 대통령”이라며 “내가 대통령이 되면 트럼프를 사면하겠다”고까지 했습니다. 끝내 트럼프 지지 의사를 표시하지 않은 2명의 후보에 대해서는 청중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습니다.
트럼프는 성추문 입막음을 위해 돈을 건네고 회사 비용으로 처리한 혐의로 올해 3월 형사재판에 넘겨진 상태입니다. 백악관 기밀문서 유출, 2021년 1·6 의회 폭동 선동, 2020년 조지아주 대선 결과 뒤집기 시도 등의 혐의로도 기소됐습니다.
전·현직 대통령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형사 기소돼 4개의 재판을 받으면서 선거운동을 해야 하지만 마가들의 열성적인 지지로 경쟁에서 멀찍이 앞서가고 있습니다. 그의 사법리스크에 대한 당내 냉정한 평가는 점점 찾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 사법리스크로 드러난 이재명표 ‘선사후당’ 정치
내년 총선을 6개월여 앞둔 상황에서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정치적으로 기사회생했습니다. 재판부는 현시점에서 이 대표의 방어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고 증거인멸 염려도 크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민주당은 이 대표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고 있습니다. 이 대표가 검찰 공화국 순교자 이미지까지 가져가면서 민주당은 완벽한 ‘이재명당’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입지가 탄탄해진 친이재명계는 ‘이재명 직인이 찍힌 총선 공천장’을 강조하면서 승리의 환호를 지르고 있습니다.
이번 구속영장 기각을 두고 검찰의 무리한 수사 관행과 언론플레이는 비판받아야 합니다. 제1야당 대표가 국정운영 쇄신을 요구하며 단식에 나섰음에도 농성장에 한 번도 찾지 않은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의 일방적 국정운영도 되돌아볼 시점입니다.
하지만 구속영장 기각으로 날개를 달게 된 이 대표의 그간 행보 역시 짚어볼 점이 많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당을 이용하고, 강성 지지층을 통해 당내 비판 목소리를 억압했습니다. 이런 행보가 이어진다면 구속영장 기각은 이 대표나 민주당에 오히려 불행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 대표는 대선 패배 두 달 만에 정치적 고향인 경기도를 떠나 아무 연고 없는 민주당 텃밭인 인천 계양을에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습니다. 선거 막판에는 계양을에서조차 국민의힘 무명 후보에게 추격당하면서 지방선거 총괄선대위원장을 맡고 있음에도 전국 유세 대신 본인 지역구 선거운동에 전념했습니다.
대선에서 서울지역 의원들의 반발로 폐기했던 ‘김포공항 이전 공약’을 꺼내 본인 지역구 선거에 활용했습니다. 이로써 지방선거에서 서울지역 민주당 후보가 초토화되는 데 일조했습니다. 당은 참패했지만 그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지방선거 패배 책임론에도 굴하지 않고 한 달 만에 다시 전당대회에 출마했습니다.
당 대표가 되자 그는 민주당을 ‘이재명당’으로 야무지게 활용했습니다. 당헌·당규까지 고쳐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된 경우에도 당 대표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호신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이 대표가 내년 총선을 준비하겠다면서 구성한 혁신위원회는 근본적인 당 개혁은 내팽개친 채 ‘친이재명계’ 의원들과 강성 지지층인 ‘개딸’이 요구했던 당 대표 선거 대의원제 폐지 방안을 꺼냈습니다. (논란만 남기고 갔단다… 해체가 개혁인 ‘민주당 혁신위’ 편 참고)
올해 6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불체포특권 포기’를 선언했던 이 대표는 체포동의안 표결을 하루 앞두고 부결을 촉구하면서 공개적으로 말을 바꿨습니다. 만일 이 대표가 본래 약속대로 가결을 호소했다면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이라는 신뢰를 얻으면서 당내 고질적인 계파 갈등도 줄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당이야 어찌 되든 나만 살고 보겠다는 태도를 보여줬습니다.
사실 이 대표의 선사후당(先私後黨) 행보는 일찌감치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이 대표는 정치 입문 초기부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당을 활용하는데 능숙했습니다.
이 대표는 2008~2010년 민주당 부대변인을 맡았습니다. 당 홈페이지를 보면 당시 이재명 부대변인 실명으로 낸 논평 22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대표의 논평 중에서는 제2롯데월드 반대가 6건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제2롯데월드 건설을 위해 성남시에 있는 서울공항을 이전하거나 활주로를 신설해야 했기에 성남 지역의 반대가 컸던 사안입니다.
당시 행정안전부가 추진했던 성남·하남·광주시 통합 반대 논평이 3건으로 두 번째로 많았습니다. 2006년 성남시장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던 이 대표는 당 부대변인으로서 지역 간 통합을 극도로 반대했고, 결국 통합은 무산됐습니다. 부대변인으로서 성남시장 자리를 지켜낸 이 대표는 다음 해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습니다.
보통 당의 부대변인은 지도부가 챙기지 못하는 사안이나 현안을 중심으로 당 입장에서 필요한 논평을 쓰는 역할을 합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자신의 지역구 이해관계가 걸린 논평을 직접 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 민주당 관계자는 “이 대표는 부대변인 시절 당이 원하는 논평보다 본인 지역구에 관한 논평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며 “일반적인 부대변인들과는 확실히 달랐다”고 회상했습니다.
● 마가와 개딸, 극단 팬덤의 폐단
자신을 변방 장수로 칭하는 이 대표의 정치 행보는 미국 주류 정치계의 아웃사이더 출신인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여러 면에서 비슷합니다.
트럼프는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자신의 정치적 위기 때마다 지지층을 선동해왔습니다. 자신에게 비판적인 검사나 특정 법관을 좌표 찍는 것도 서슴지 않습니다. 마가 팬덤 정치 앞에 공화당 의원들은 트럼프에 대한 공개 비판을 점점 자제하는 분위기입니다.
지난해 12월 민주당 홍보국은 이 대표를 수사하는 검사 16명의 실명을 담은 웹자보를 제작해 소셜미디어에 배포했습니다. 이 대표는 검찰 소환 과정에서 페이스북에 ‘당당하게 맞서겠습니다’는 문구와 함께 출석 시간과 장소를 적은 게시물을 올려 사실상 ‘개딸 동원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개딸 중심으로 체포동의안 가결표를 던진 의원들 색출에 나섰고, 일부 의원들은 무기명으로 진행된 체포동의안 표결에서 직접 찍은 부(否)표 사진을 공개하고, 소셜미디어에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촌극을 벌여야 했습니다.
● 이재명 구속영장 기각, 환호할 때 아니다
미국 정치 분야 베스트셀러인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책에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극단주의자나 선동가를 막기 위해서는 정치 엘리트 집단, 정당이 민주주의의 문지기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개딸에 점령된 민주당은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입니다.
이제 역설적으로 공은 이 대표에게 돌아갔습니다. 이 대표는 구속영장 기각 직후 인터뷰에서 “이제는 상대를 죽여 없애는 전쟁이 아니라 국민과 국가를 위해 누가 더 많은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를 경쟁하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로 되돌아가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정부·여당을 향한 발언이지만 이 대표 스스로 실현해야 할 말이기도 합니다. 이미 이 대표가 벌인 일로 인해 지난 대선 이후에 일어난 정치권 혼란을 지켜보면서 국민 피로감은 극에 달해있습니다.
벌써 강성 친명계를 중심으로 체포동의안 가결 투표를 ‘해당 행위’로 간주하고 징계 카드까지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원내대표, 최고위원 모두가 친명 일색으로 꾸려진 데다 새로 입당한 수만 당원 역시 강성 이 대표 지지자가 다수인 상황에서 이재명 쏠림 현상은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 대표에게는 이제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극단적 사당화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되 총선 승리와는 멀어지는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비명계에 대한 공개 사냥을 멈추고 당내 민주주의를 회복해 민주당의 정체성을 회복할 것인가. ‘선사후당’을 버리고 ‘선당후사’를 통해 개딸의 아버지가 아닌 국민 지도자로 성장할 마지막 기회가 이 대표에게 찾아왔습니다.
‘한국 정치의 수준은 왜 나아지지 않는가?’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각각 두 번씩 취재하며 가진 의문에 대해 해외 정치와 비교하면서 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empty@donga.com으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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