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지난해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1년 6개월을 훌쩍 넘겼지만 최근 외신에 공개된 러시아 내년 예산안 초안에 따르면 총예산이 올해보다 15% 불어났다. 최신식 무기와 군수품 조달에 이미 천문학적인 재정을 썼을 법한데 예산을 어떻게 더 늘릴 수 있을까. 게다가 미국 유럽 등 서방은 똘똘 뭉쳐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며 무역과 금융 거래를 끊고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다. 그런데도 예산을 늘릴 정도로라면 경제가 호조라는 얘기이니 서방으로선 아이러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 ‘짝퉁’ 스타벅스와 빅맥이 팔리는 러시아
러시아 경제는 외면적으로는 전쟁 전과 큰 차이 없이 돌아가는 분위기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침공 뒤 러시아에서 철수한 서방 기업들을 러시아가 헐값에 인수해 수익을 올리고 있다.
대표적으로 스타벅스는 러시아 기업에 인수돼 ‘스타커피’로 바뀌었다. 맥도날드를 인수한 현지 기업은 ‘빅맥’ 대신 ‘빅히트’를, ‘해피밀’ 대신 ‘키즈 콤보’를 내놓고 있다. 크리스피 크림 도넛은 ‘크런치 크림’으로 탈바꿈했다. 피자헛은 ‘피자N’으로 바뀌었는데 러시아어 알파벳 N이 영어 H와 비슷해 착시 효과를 노렸다고 미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물론 전쟁 후 러시아 경제는 타격을 받았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 따르면 러시아 통계청은 올 1분기(1~3월) 경제성장률이 -1.9%였다고 발표했다. 러시아 재무부는 올 1~4월 연방정부 재정 적자가 3조4200억 루블(약 59조 원)에 이른다고 공개했다. 앞으로도 여건은 좋지 않다. 블룸버그는 올해 러시아 경제가 2.5% 역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 ‘그림자 선단’으로 원유 수출 늘려
러시아 경제 지표가 당장은 초라하지만 국가 부도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외신들은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보도를 잇달아 내보내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4일 자체적으로 해운 및 보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지난달 러시아산 원유 해상 운송량의 약 4분의 3이 서방 해상운송보험을 들지 않은 상태로 이동했다고 보도했다.
서방은 해상운송보험을 수단으로 러시아산 원유 수출을 제어할 계획이었다. 서방 해상운송보험을 통하지 않고서는 수출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FT는 러시아산 원유 수출이 올봄 들어 50%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에너지 컨설팅 업체 케이플러 데이터를 인용해 분석했다.
러시아산 원유를 보험 없이 수출하는 배들은 ‘그림자 선단’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자 선단은 글로벌 정유회사에 소속되거나 해상운송보험을 들지 않고도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 같이 미국 경제 제재를 받는 국가들과 거래하는 유조선들이다. 미 CNN방송은 올 3월 러시아 원유를 운반하는 그림자 선단이 약 600척으로 구성돼 있다고 추산했다.
이처럼 그림자 선단으로 원유를 거래하기 때문에 유럽연합(EU)과 주요 7개국(G7)이 지난해 말 러시아산 원유 수출 제한을 위해 도입한 원유가 상한제가 실효성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러시아는 상한제와 무관하게 원유 가격을 매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오히려 러시아는 국제 에너지 시장을 쥐락펴락하기까지 하는 모양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플러스) 회원국으로 원유 감산을 지속해 석유시장을 혼돈에 빠트려온 러시아는 자국 내 연료 가격 안정화를 명분으로 경유와 휘발유 수출을 잠정 중단한다고 21일 발표했다. 이에 유가 시장이 요동치며 경유 선물 계약분이 이날 4% 이상 뛰기도 했다고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보도했다.
● 러시아 수입품, 위안화로 결제
러시아가 서방 경제 제재를 회피하는 데에는 중국도 한몫하고 있다.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에 따르면 지난해 말까지 러시아가 수입한 물품의 20%가량이 위안화로 청구됐다고 FT가 27일 보도했다. 전년 대비 3% 증가했다. 서방은 국제 결제네트워크인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에서 러시아 금융기관을 배제함으로써 러시아 돈줄을 끊어 금융 거래와 교역을 막고 있는데 이 틈을 위안화가 메워주고 있는 것이다. FT는 “이는 러시아가 제재를 우회하기 위해 서방 은행을 어떻게 피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며 “무기 제조에 사용 가능한 물품이나 이중용도 장비 수입 분야에서 위안화 송장(送狀) 발행 증가가 더 뚜렷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정부 고문을 지낸 세르게이 구리예프 프랑스 파리정치대(시앙스포) 교수는 “제재가 러시아 경제를 파괴하지는 않았다”며 “서방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전쟁 자금 조달 능력을 제한하긴 했지만 막지는 못했다”고 WSJ에 말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에서 불거지는 경제 이슈가 부쩍 늘었습니다. 경제 분야 취재 경험과 유럽 특파원으로 접하는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 유럽 경제를 풀어드리겠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