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빛난 K-컬처]
300평 전시실에 작가 28명 참여… 필라델피아, 역대 최대 韓미술전
뉴욕-덴버-샌디에이고서도 마련
워홀 재단 등 후원… 위상 달라져, NYT “한국계 여성 큐레이터 파워”
19일(현지 시간) 미국 동부 대도시 필라델피아를 대표하는 필라델피아 미술관 앞. 영화 ‘록키’에서 주인공이 계단을 뛰어올라 두 팔을 번쩍 드는 장면을 촬영해 유명해진 ‘록키 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오르니 미술관 기둥 가운데 영어로 ‘Korean Art after 1989’(1989년 이후의 한국 미술)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나타났다. 미술관의 ‘간판 전시’로 한국 미술전을 내세운 것이다. 계단 앞에서 만난 관람객 이선 닐리 씨(34)는 “한국 미술이라고 하면 뭔가 ‘쿨(cool·멋진)’할 것 같은 느낌이라 기대된다”고 말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시간의 형태: 1989년 이후의 한국 미술’ 특별전을 이달 21일부터 개최했다. 미국 7대 미술관의 하나로 147년 역사를 지닌 이곳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조명하는 특별전이 열린 것은 처음이다. 약 1000㎡(약 300평) 전시실에 작가 28명이 참여해 규모에서 역대 최대 한국 현대미술전이다. 내부에 전시명이 한글로도 쓰여 있었다.
● 美 5개 미술관에 K미술전
“미국에 온 지 27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실감이 잘 안 나요.”
전시를 기획한 우현수 필라델피아 미술관 부관장은 “싸이 ‘강남스타일’ 직후인 2014년 기획을 시작해 BTS가 미국을 흔든 지금, 미술관의 ‘대표 전시’로 한국 현대미술을 소개할 수 있게 됐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미술로 옮겨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필라델피아 미술관뿐 아니라 올가을 미 주요 미술관 5곳에서 한국 미술을 조명하는 전시회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린다. 뉴욕을 대표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메트)이 다음 달부터 ‘리니지’ 전시를 열어 12세기 칠기부터 한국 근현대 미술을 아우르는 작품 30여 점을 공개할 예정이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지난달부터 국립현대미술관과 손잡고 1960, 70년대 한국 실험미술 전시를 열고 있다. 샌디에이고 미술관은 이달에, 덴버 미술관은 12월부터 각각 한국전을 연다. 앞서 6, 7월 뉴욕 록펠러센터에서도 얼마 전 작고한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작가 등의 작품을 모아 한국 미술전을 열었다.
뉴욕타임스(NYT)는 “하반기(7∼12월) 미 주요 미술관 최소 5곳에서 한국전이 열릴 만큼 미국이 한국 미술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다”며 이 같은 열기를 전면 기사로 소개하기도 했다. 대형 미술관에 중국관이나 일본관이 생기면 구색 맞추기로 한국관이 마련되던 과거와 달리 변화된 흐름이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메트나 필라델피아 미술관과 같은 미 대형 미술관은 민간기관이라 ‘펀딩(모금)’이 전시 개최에 중요한 영향을 준다. 수십 명 큐레이터 간 경쟁 속에 후원 재단들이 기부할 만한 주제여야 미술관에서 이른바 ‘간판 전시’로 재정, 마케팅 등 자원을 밀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우 부관장은 “필라델피아의 이번 한국전에 명망 있는 앤디워홀재단, 퓨재단이 후원했다. 그만큼 한국 미술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 미국 내 한국계 여성 큐레이터 파워
미 전역의 동시다발적 미술 전시에는 한국계 여성 큐레이터들의 파워가 있었던 점도 주목을 받고 있다. 우 부관장은 이화여대를 졸업한 뒤 1996년 미 유학 후 2006년 필라델피아 미술관 큐레이터로 부임했고, 2021년에는 임원급인 부관장으로 승진해 아시아 미술뿐 아니라 전체 소장품을 담당하고 있다. 구겐하임의 한국 실험미술전은 국립현대미술관의 강수정 학예관과 구겐하임의 안휘경 어소시에이트 큐레이터의 협업으로 탄생했다. 덴버 미술관도 한국인인 김현정 큐레이터가 분청사기 전시를 맡고 있다.
메트의 ‘리니지’ 전시회 역시 한국계인 엘리너 현 큐레이터의 기획으로 시작됐다. 현 큐레이터는 “메트가 처음(1889년) 소장한 한국 예술품은 악기이고 이후 분청사기가 추가됐다”며 “메트의 소장품과 한국에서 대여한 근현대 회화를 통해 한국 예술의 ‘계보(리니지)’를 뉴욕에 소개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142년 역사상 첫 여성 디렉터로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을 이끄는 김민정 관장도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 NYT는 김 관장 등을 언급하며 “한국계 여성 큐레이터의 리더십이 이 같은 다양한 한국전을 가능하게 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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