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소리가 들리면 늘 죽음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기습 공격에서 살아남은 이스라엘 주민)
“1948년 첫 나크바(아랍어로 ‘재앙’·당시 대규모 강제 이주를 말함) 이후 두 번째 나크바가 올까 두렵다. 이 땅을 떠나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주민)
팔레스타인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해 민간인 1000명 이상을 학살하며 촉발한 중동전쟁의 오래된 근원은 사실 땅이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 표현을 빌리자면 더 정확하게는 ‘누가 요르단강과 지중해 사이에 있는 땅에 살 권리가 있는가’다. 이스라엘 땅은 어디서 시작하며 팔레스타인 땅은 어디서 끝나는지를 놓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및 주변 중동 국가들은 100년 넘게 갈등과 충돌의 나날을 이어오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이 복잡하고 뿌리 깊은 난제를 해결해 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동안 몇 차례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21세기 들어서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하마스의 유례없는 이스라엘 본토 침공과 이스라엘의 대규모 가자지구 공습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 반복되는 ‘피의 보복’을 더욱 풀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두 민족의 100년 분쟁사 속에서 이번 중동전쟁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들여다봤다.
● 英,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의 비극
역사학자이자 주미 이스라엘대사를 지낸 마이클 오렌은 1967년 6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6일 전쟁’을 다룬 저서 ‘전쟁의 6일(Six Days of War·2002년)’에서 “가볍게 말해, 시오니즘(시온주의·유대인 민족주의)이 없었다면 분쟁도 없었다”고 했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쫓겨나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던 유대인들이 다시 시온(이스라엘)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시온주의가 분쟁의 시초라는 것이다.
19세기 말 시온주의를 앞세운 동유럽 유대인들은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400년간 지배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분쟁의 씨앗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싹텄다. 독일 편을 든 오스만 제국 제압을 위해 영국은 오스만 제국 지배에 저항하는 아랍 민족주의 세력과 자본을 쥔 유럽 유대계 세력의 지원이 필요했다. 영국은 1915∼1916년 오스만 제국에 봉기하는 조건으로 전후 팔레스타인에 아랍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하는 ‘맥마흔 선언’을 작성한다. 2년 뒤에는 유대 자본을 받는 조건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하는 ‘밸푸어 선언’도 만든다.
결국 영국 뜻대로 패전한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고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위임 통치하게 된다. 문제는 영국이 유대인과 아랍 민족에게 한 모순되는 약속을 지킬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사이 갈등은 고조됐다. 1930년대 들어 독일 나치 정권의 박해와 홀로코스트를 피해 대규모 이주한 유대인들은 땅을 더 많이 매입해 정착촌을 늘려갔다. 두 민족의 무력 충돌을 우려한 영국은 1939년 백서(White Paper)를 통해 밸푸어 선언 효력을 사실상 폐기하지만 갈등의 불씨는 커질 대로 커져 있었다.
● 이스라엘 건국과 팔레스타인 나크바
2차대전이 끝난 뒤 팔레스타인 문제를 매듭지을 능력이 없던 영국은 막 창설된 유엔에 책임을 넘겼다. 유엔은 1947년 종교적으로 양측에 다 중요한 예루살렘은 국제 관리 아래 두고 나머지 땅을 두 국가로 분할하는 유엔총회 결의안 181호를 통과시켰다. 유대인 세력은 대부분 찬성했지만 아랍 세력은 ‘인구 대부분인 팔레스타인인에게 불리하다’며 거부했다. 팔레스타인 각지에서 두 민족 간 유혈 충돌이 늘어났다.
영국 위임 통치 만료 다음 날인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건국을 선포했다. 이튿날 팔레스타인 세력과 힘을 합친 아랍 국가 동맹군이 이스라엘을 침공(1차 중동전쟁)했다. 하지만 정신적, 물질적으로 더 잘 무장된 이스라엘이 승리하며 건국 당시보다 더 많은 영토를 장악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 약 70만 명이 고향을 떠나거나 이스라엘군에 쫓겨나 난민으로 전락했다. 팔레스타인인은 이를 ‘재앙’ ‘전멸’이라는 뜻의 아랍어 ‘나크바’라고 불렀다. 이들은 대부분 요르단이 장악한 서안지구와 이집트가 획득한 가자지구로 몰려갔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인 역사학자 라시드 할리디는 저서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에서 유대인 정착 과정과 시온주의는 서구 열강을 등에 업은 식민주의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FP는 최근 이스라엘-하마스 중동전쟁과 관련해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북부 주민에게 대피령을 내렸을 때 주민들은 (나크바라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떠올렸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대피 명령에도 가자지구 북부 주민 수십만 명은 다시 집에 돌아오지 못할까 두려워 떠나지 않고 있다.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및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등 주변 아랍국은 1956년 수에즈 운하 위기, 1967년 6월 전쟁(6일 전쟁),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등으로 충돌했다. 모두 뛰어난 전략과 서방의 지원을 앞세운 이스라엘의 승리였다.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서안지구, 시나이반도, 골란고원을 손에 넣었다.
그 결과 가자지구 등으로 유대인 집단 이주가 시작되자 반발하는 팔레스타인 세력은 테러를 비롯한 유혈투쟁으로 맞섰다.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1964년 설립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대표적이다. PLO는 1972년 뮌헨 올림픽 이스라엘 선수단 학살, 항공기 납치, 폭탄 테러 등으로 팔레스타인 분쟁을 국제적 이슈로 부각시켰다.
● 잇따른 화해 결렬과 가자지구 봉쇄
이제 팔레스타인 분쟁은 이스라엘의 점령과 유대인 정착촌 문제로 초점이 맞춰졌다. 하마스의 전례 없는 기습 공격과 민간인 학살의 씨앗이 이때 잉태됐다고도 볼 수 있다. 반면 불안정한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 노력도 가시화했다.
1978년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 중재로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돌려줬고,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팔레스타인자치정부(PA)를 수립하는 구상이 짜였다.
하지만 자치정부 수립 과정은 지지부진했고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은 1987년 이스라엘 점령에 항거하는 1차 인티파다(봉기)를 일으켰다. 그해 이슬람 성직자 아메드 야신이 ‘이스라엘 존재 절멸’을 목표로 이집트 수니파 근본주의 조직 무슬림형제단에 뿌리를 둔 하마스를 설립했다.
1993년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대한 팔레스타인 자치권을 공인하는 평화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라빈 총리는 이 협정에 반발한 이스라엘 극우파 청년에게 2년 뒤 암살됐다. 협정 결과 PA가 수립됐지만 이스라엘을 인정한 데다 부패 의혹 등으로 오히려 하마스가 지지 기반을 넓혀 갔다. 양측 유화파 입지는 줄어들었다.
2000년 이스라엘 극우 정치인이자 훗날 총리가 되는 아리엘 샤론이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성지(聖地)가 모두 있는 동(東)예루살렘 이슬람교 알아끄사 사원을 방문하면서 두 번째 인티파다가 일어났다. 충돌과 폭력 사태가 이어졌다.
5년여 지속된 유혈 분쟁을 끝내기 위해 2005년 미국 러시아 유엔 등이 중재에 나서 ‘중동 평화 로드맵’이 만들어졌다. 로드맵을 승인한 이스라엘 정부는 가자지구에서 군과 정착민을 철수시켰다. 또 팔레스타인의 독립국가 권리를 처음 인정했다.
하지만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가 PA에 승리하고 이듬해 가자지구를 장악하자 분위기는 바뀌었다. ‘이스라엘 존재를 부정’하는 하마스에 맞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봉쇄했다. 지중해 연안을 제외한 3면을 총연장 65km, 높이 6m 장벽으로 막고 주민 이동 및 물자 반출과 반입을 제한했다. 주민들은 실업률 50%라는 극도의 경제난을 겪고 있다. 유엔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의 인도주의적 위기를 심화시켰다고 지적했다.
서안지구에는 오슬로 협정에 어긋나는 유대인 정착촌이 급격히 늘었다. 팔레스타인인 약 300만 명이 거주하는 이곳에 현재 이스라엘인 약 66만 명이 정착촌 200여 곳에 살고 있다. 2014년 7월 서안지구 정착촌 이스라엘 소년 3명이 하마스 대원들에게 납치, 살해됐다. 이스라엘 지상군은 2005년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자지구에 진입해 작전을 벌였다.
2021년 이스라엘 경찰이 알아끄사 사원을 습격해 양측은 11일간 로켓 공격을 벌였다. 하마스는 이번 이스라엘 기습 공격 이유로 “(이스라엘의) 알아끄사에 대한 적대 행위”를 들었다. 이슬람교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한 장소로 간주되는 이곳은 무슬림 아닌 사람은 특정 시간대에 정해진 구역만 방문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연립정부를 구성한 극우 성향 정치인 등이 미국 등의 만류에도 이곳을 찾으면서 하마스에 명분을 제공했다는 해석도 있다.
● ‘두 국가 해법’, 최선은 아니라 해도…
중동 전문가들은 알아끄사에 대한 적대 행위가 이스라엘 공격의 진짜 원인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것보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국들의 관계 정상화가 분쟁을 먹고 사는 하마스와 그 배후인 이란에 모두 불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는 것이다. 중동 평화가 오면 하마스로서는 이스라엘과 아랍국 사이에서 존재 이유를 상실하고, 사우디와 중동 맹주를 다투는 이란은 아랍국가 사이의 외로운 섬으로 전락할 우려가 커진다.
하마스와 이란의 이 ‘중동 평화 훼방’ 구상은 현재까지 먹혀드는 것으로 보인다. 아랍권을 제외한 세계 여론은 하마스의 잔혹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비판과 어린이 사상자가 많이 나오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 비판으로 크게 나뉜다.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는 “(지금까지 보면) 하마스가 오히려 승리한 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명분도 잃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봉쇄된 (가자지구) 공간에 폭탄 6000발을 퍼부어 어린이가 죽고 국제법이 흔들리며, 장기 봉쇄로 주민 삶이 얼마나 열악해졌는지 국제사회가 잘 보게 됐다는 것이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아프리카중동연구부장)는 “하마스가 (이스라엘 지상군 투입이라는) 전쟁 2단계에 역점을 두고 기습 공격을 했다는 합리적 추론이 든다”고 지적했다. 가자지구 시가전이 교착 상태에 빠져 민간인 피해만 늘어난다면 국제사회 여론은 더 나빠져 이스라엘이 ‘외교적 외톨이’가 될 것이라는 계산을 했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서로를 “궤멸시키겠다” “파괴하겠다”면서 먼저 무기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는 이스라엘과 하마스를 볼 때 이번 전쟁이 곧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성일광 고려대 중동이슬람센터 교수(한국이스라엘학회장)는 “하마스에 있는 ‘후드나(장기 휴전)’ 개념이 그나마 현실적으로 비치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계략으로 치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마스가 다시 공격할 힘을 비축하기 위한 시간 벌이로 본다는 것이다.
이번 전쟁이 수습된다 해도 팔레스타인 문제는 다시 땅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팔레스타인 국가가 세워졌다면 지금까지 두 민족 분쟁사는 강도와 내용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00% 미덥지는 않더라도 ‘두 국가 해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인 교수는 “동예루살렘 귀속 문제나 난민 발생 우려 등으로 가능성이 높지는 않겠지만 두 국가 방안 말고는 답이 없다”며 “(지금 같은 방식으로) 섞여 살면 갈등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분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 교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온건파 파타가 가자지구를 통제할 수는 없다.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운다 해도 하마스가 반대하면 가자지구 서안지구 이스라엘의 3국가 3체제 방식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다만 이 교수는 “지난 50년간 충분히 논의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며 “국민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상대를 국가로 인정하긴 더 어렵다.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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