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질, 시가전 피해, 아랍권 여론, 헤즈볼라 참전 등 변수
미국, 이스라엘 편이지만 ‘인질 안전’에 우선 순위
멀게 느껴지지만 우리와 뗄 수 없는 중동. 그 생생한 현장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정치, 경제, 자원, 종교, 역사, 문화가 얽혀 있는 갈등과 변화의 ‘핫스팟’ 중동의 모습을 쉽고, 재미있게 또 인사이트를 담아 알려 드리겠습니다.
카이로특파원, 국제부 차장, 카타르의 싱크탱크 아랍조사정책연구원(ACRPS)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중동을 취재했습니다. 단행본 <중동 라이벌리즘>과 <있는 그대로 카타르>를 펴냈습니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근거지인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이 거세지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27일(현지 시간) “전쟁이 2단계에 돌입했다”고 밝혔다. 같은 날 다니엘 하가리 이스라엘군 대변인도 “군대(이스라엘군)가 그 땅(가자지구 북부)에 주둔 중이고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고 있다고 말했다.
7일 하마스의 대규모 공격 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전면 봉쇄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공습을 감행했다. 23일에는 보병부대와 탱크를 가자지구 안으로 처음 투입했다. 가자지구 안에 이스라엘 군대가 진입해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이 이번 하마스와의 전쟁 중 처음 발생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25일부터 매일 가자지구로 지상군을 투입했다. 현지 언론과 외신들에 따르면 공격 범위가 넓어지고 강도도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 가자지구에 주둔하며 지상전이 확대되고 있다.
다만, 이스라엘은 아직 ‘전면전’이란 표현은 안 쓴다.
이제 가자지구 안팎에서는 전면적인 지상전이 벌어지는 시점이 언제일지에 주목하고 있다. 또 이스라엘이 1400여 명이나 자국민이 사망한 이번 전쟁에서 지상전을 16일 뒤에나 시작했고, 여전히 ‘전면적 지상전 개시’는 선언하지 않는 배경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 하마스 궤멸보다 인질 석방에 관심 많은 미국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궤멸 시키겠다’고 강조하면서도 지상전에 전면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는 인질과 미국이 꼽힌다.
성일광 고려대 중동‧이슬람센터 정치경제연구실장은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는 분명하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인질이든 군인이든 자국민이 희생되는 건 큰 부담”이라며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이 1년 밖에 안 남은 상황이라 더욱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동안 바이든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간 외교 정상화 추진을 포함해 중동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번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전쟁만으로도 내년 대선에 심각한 악재다. 미국인 사상자 발생과 중동 정세가 더 혼란스러워지는 건 바이든 대통령으로선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하는 추가 악재다.
●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민간인 모두 피해 클 수밖에 없어
현재 이스라엘에선 하마스에 대한 증오가 넘쳐난다. 30만 명 정도의 지상군을 가자지구 인근에 배치했을 만큼 준비도 돼 있다.
하지만 가자지구에서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끔찍한 시가전’과 ‘대규모 민간인 피해’는 피할 수 없다. 하마스 보건부에 따르면 이미 이번 전쟁으로 가자지구에선 6747명(26일 기준)이 숨졌다.
무엇보다 가자지구는 인구 밀도가 높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건물들은 촘촘하게 들어서 있고, 지하에는 480km 길이의 땅굴이 조성돼 있다.
아무리 이스라엘군이 세계 정상급의 역량을 갖춘 군대라고 해도 이런 지역에서 전면적인 지상전이 펼쳐진다면 대규모 사상자 발생은 피하기 어렵다. 미국도 과거 이라크 전쟁에서 대규모 시가전이 펼쳐졌던 ‘팔루자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팔루자와 달리 가자지구에서의 지상전은 지하 땅굴에서도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군의 피해는 예상보다 훨씬 더 커질 수 있다.
하마스의 ‘인간 방패 전략’과 이스라엘군의 대규모 공격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 역시 커질 수밖에 없다. 사실상 민간인과 하마스 대원을 구별하는 게 어려운 상황에서 여성과 어린이 사상자가 늘어나면 아랍권은 물론이고 국제사회 전체적으로도 반이스라엘 여론이 빠르고 강하게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카타르의 싱크탱크인 아랍조사정책연구원(Arab Center for Research and Policy Studies·ACRPS)이 지난해 아랍권 14개 나라에서 3만33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84%가 ‘이스라엘과의 수교를 반대한다’고 답했다. 찬성은 8%에 그쳤다. 또 76%가 ‘팔레스타인 문제는 아랍 전체의 문제다’라고 답했다.
이번 하마스의 대규모 공격은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화해 분위기를 파괴하려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다. 이스라엘로서는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가 늘어나고, 이로 인해 아랍권의 반이스라엘 정서가 강해지는 것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무시한다는 건, 하마스가 파놓은 함정에 그대로 빠지는 꼴이다.
이스마일 하니예를 비롯한 하마스의 최고 지휘부가 이미 카타르로 피신해 있다는 점도 이스라엘로서는 부담이다. 하마스 궤멸에 필요한 최고 지휘부 제거가 가자지구에서의 전면적인 지상전으로는 이미 달성할 수 없는 목표가 됐기 때문이다.
하마스와는 차원이 다른 무장정파인 헤즈볼라가 본격적으로 참전할 경우 이스라엘로서는 서부(하마스)와 북부(헤즈볼라)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헤즈볼라는 하마스보다 훨씬 더 체계적이고, 파격적인 이란의 지원을 받아왔다. 이미 20만여 기의 로켓과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헤즈볼라는 시리아 내전, 이슬람국가(IS) 퇴치 작전 등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의 최고 정예부대인 ‘쿠드스군’과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한 적도 많다. 그만큼 제대로된 실전 경험도 풍부하다는 뜻이다. 쿠드스는 아랍어로 예루살렘을 의미한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뜻에서 해외작전과 특수작전을 수행하는 최정예 자국 군대의 명칭을 쿠드스군으로 정했다.
헤즈볼라는 2006년 34일간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며, 이스라엘을 곤혹스럽게 만든 경험도 있다. 당시 100명 이상의 이스라엘군이 사망했다. 또 이스라엘은 ‘헤즈볼라를 궤멸시키겠다’고 강조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레바논에서는 1000여 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당연히 국제사회에서 이스라엘은 큰 비난을 받았다.
사우디 싱크탱크인 킹파이잘 이슬람연구센터의 조셉 케시시안 수석연구위원은 “이스라엘이 전면적인 지상전에 못 나서는 큰 이유 중 하나는 헤즈볼라의 참전 가능성 때문”이라며 “헤즈볼라가 정식으로 참전할 경우 미국의 지원이 있더라도 이스라엘로서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그래도 전면전은 피하기 어려워
그렇다면 가자지구에서 전면적인 지상전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을까.
많은 중동 전문가들은 ‘현실적으로 전면전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고 답한다. ‘이스라엘판 9‧11 테러’로 불릴 만큼 피해가 큰 상황에서 이스라엘로서는 하마스의 본거지인 가자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진행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 30만여 명의 군대를 가자지구 인근에 집결시켜 놓았다는 것만으로도 가자지구에서의 전면적인 지상전에 대한 이스라엘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다만, 가자지구를 이스라엘이 완전히 장악한다고 해도 하마스를 완전히 제거하겠다는 목표 달성이 가능할지에 대해선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가자지구를 장악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예측이 어렵다.
가자지구에서의 전면적인 지상전이 펼쳐지고 헤즈볼라, 나아가 이란의 직접적인 참전과 미국의 군사 조치까지 이어질 경우 중동 정세는 다시 한번 크게 요동칠 것이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29일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를 통해 “미국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압박하지만 그들은 계속 이스라엘에 광범위한 지원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호세인 아미르압돌라히안 이란 외교장관도 27일 블룸버그TV에 “미국이 지금처럼 계속 행동한다면 미국에 대항하는 새로운 전선이 형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세계가 가자지구를 불안한 눈으로 예의주시하는 상황도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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