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무대에선 ‘레토릭(rhetoric)’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정치적 수사(修辭)’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말로, 외교 상대방이나 대중이 듣기에 좋은 문장으로 꾸며지지만 실제 행동과 반드시 일치한다는 법은 없다. 국가 지도자가 “아”라고 말했어도 실제 정책은 “어”가 될 수 있다. 최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가 취하는 행보가 그렇다.
이스라엘 비난하는 사우디 속내
사우디는 11월 11일 수도 리야드에서 열린 이슬람협력기구 특별 정상회의에서 이스라엘을 강하게 비난했다. 사우디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임은 점령 당국에 있다”면서 “가자지구 포위를 끝내고 인도주의적 지원을 허용할 것을 촉구한다”며 이스라엘을 성토했다. 이를 두고 대다수 국내외 언론은 “사우디가 팔레스타인 편을 들고 있으며, 이란과 함께 반(反)이스라엘 공동전선을 구축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현재 사우디가 취하고 있는 군사적·외교적 행보를 보면 빈 살만 왕세자의 이스라엘 비난은 아랍권 여론을 의식한 레토릭으로 보인다.
사우디는 가자지구 군사작전이 시작된 이후 예멘 후티 반군이 이스라엘을 향해 발사하는 미사일·드론을 전투기와 지대공미사일을 동원해 계속 요격하고 있다. 예멘 북서쪽을 장악한 후티는 미사일과 드론을 홍해나 사우디 서부 해안 상공을 지나는 경로로 이스라엘에 날려 보내고 있다. 이 미사일과 드론이 이스라엘에 도달하기도 전 사우디군에 의해 적잖게 격추되고 있다.
사우디는 미국과 이스라엘 공군기에도 영공을 개방했다. 최근 미국은 이라크·시리아 지역에서 계속되는 친이란 민병대의 공격에 대응해 제한적인 공습 작전을 수행 중이다. 이와 동시에 사우디와 요르단, 바레인 등에 공군력을 전개해 이란을 겨냥한 대규모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다. 미국이 이처럼 군사 행동에 나서자 사우디는 자국 영공 사용을 허가했다. 아랍 세계 강대국으로서 사우디는 같은 이슬람 세력인 팔레스타인을 옹호하며 각종 구호물자를 보내지만, 기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수월하게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수니파 vs 시아파, 이슬람 세계 오랜 갈등
정치적 수사와 실제 행동이 다른 사우디의 행보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슬람 세계는 크게 수니파와 시아파로 쪼개져 있고, 이들은 서로를 사실상 이단처럼 규정하면서 적대시한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은 1400여 년간 이어져왔고, 사우디의 경우 수니파 중에서도 강경파로 분류되는 와하브파 세력이 통치하는 국가다. 시아파 종주국을 자처하는 이란과는 말 그대로 철천지원수 사이다. 이슬람혁명 후 신정(神政) 일치의 절대 권력자가 된 루홀라 호메이니 전 이란 최고지도자는 “사우디의 와하비즘은 이단이고, 이란의 이슬람혁명 사상을 수출하겠다”며 사실상 선전포고를 했다. 호메이니의 뒤를 이은 알리 호세인 하메네이 최고지도자 역시 “신이 가진 복수의 손이 사우디 정치인들 목덜미를 움켜쥘 것”이라며 사우디와 투쟁을 선포하기도 했다. 지금 이스라엘과 싸우는 가자지구의 하마스는 이란이 지원하는 시아파 극단주의 조직이다.
사우디는 오래전부터 이란이 지원하는 시아파 극단주의 단체들과 싸워왔다. 2014년 이후 계속된 예멘 내전은 수니파 정부와 시아파 후티 간 싸움인데, 사실상 사우디와 이란의 대리전쟁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이란은 후티 반군에 군사고문단과 무기를 제공했고, 사우디는 수니파 정부군을 도우면서 아예 다국적군을 만들어 참전했다. 올해 4월부터 사우디가 주도해 후티와 평화협상을 하고 있지만 협상은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는 상태다.
이런 와중에 11월 12일 사우디가 돌연 포병을 동원해 예멘 북부 ‘사다’ 지역을 포격했다. 현지 매체에 따르면 사우디군은 이날 아침 대구경 포탄 수십여 발을 발사해 사다 일대를 집중 포격했다. 그 결과 민간인 5명이 부상하고 가옥 여러 채가 파괴됐다. 후티 측은 사우디의 포격에 별다른 입장을 내지 않았지만, 현지 매체들은 “사우디 범죄자들이 예멘 지역을 포격해 그동안 많은 순교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며 사우디의 공격을 성토했다. 평화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사우디는 왜 갑자기 예멘에 포격을 가한 것일까. 예멘 북부의 교통 요충지인 사다 지역은 오랫동안 계속된 사우디와 전투로 후티 반군 주력 부대가 대거 주둔하고 있다. 후티 지상군은 물론, 항공 전력과 미사일부대도 사우디를 공격하기 위해 이 일대에 배치된 상태다. 지난해 후티 반군이 미사일과 드론으로 사우디 서부 홍해 연안의 ‘제다’ 지역을 공격했을 때 도발 원점이 바로 이곳이었다. 즉 사우디의 이번 포격은 사다에 배치된 후티 반군의 미사일·드론 부대를 겨냥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우디가 이곳을 무엇으로 타격했는지 여부다. 사우디는 그동안 후티 반군을 공격할 때 전투기 공습을 선호했다. 그런데 이번 공격은 공군이 아니라 포병이 수행했고, 국경에서 40㎞ 이상 떨어진 지역을 타격했다. 사우디 포병이 보유한 무기 가운데 40㎞ 이상 거리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는 두 종류다. 미국 M270 MLRS와 한국산 다연장로켓 K239 ‘천무’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포격한 사다를 사정권에 둔 사우디군 포병부대는 남부 국경 인근 ‘나지란’ 지역에 있는 K239 포대다. 이 부대는 사다와 직선거리로 약 70㎞ 떨어져 있어 사격진지 이동 없이도 포격이 가능하다.
비밀리에 1조 원 규모의 천무를 수입해 일선 부대에 배치한 사우디는 후티와 평화협상을 시작한 4월 예멘 국경에 있는 K239 부대를 처음 일반에 공개했다. 사우디가 수입한 천무는 사거리 45㎞ 무유도탄인 230㎜ 로켓과 사거리 80㎞ 유도탄인 239㎜ 로켓 두 종류다. 사우디가 이번 공격에 천무를 동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는 후티 반군이 보유한 모든 유형의 포병 무기보다 긴 사거리를 지녀 포격 후 반격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후티 반군은 이번에 포탄 수십 발을 얻어맞고도 사우디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실제로 대응 사격도 하지 못했다.
이번 포격이 주목받는 이유는 사우디가 동원한 포병 자산이 정말 천무라면 이번이 천무의 첫 실전 데뷔가 되기 때문이다. 사우디 측 의도는 후티 반군의 보복 공격 가능성을 차단하고 일방적으로 포격을 퍼붓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천무는 사우디의 작전 의도를 완벽하게 달성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른 셈이 된다. 크게 선전할 만한 일이지만, 비밀리에 구입해간 외국제 무기의 전과를 철저히 비밀에 부쳐온 사우디 측 관행상 이번 포격의 구체적 진상도 당분간 공개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중동 ‘현궁 인증’ 이어져
물론 ‘보안사고’는 일어나기 마련이다. 전투를 벌여 전과를 거두면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 때문인지 사우디는 과거 한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수입한 ‘현궁’ 대전차 미사일 존재를 외부에 노출한 바 있다. 한 사우디군 병사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자국군의 현궁 사용 모습을 촬영해 올린 것이다. 그 전까지는 사우디가 현궁을 수입했다는 사실조차 비밀이었다. 이 병사는 ‘한국산 대전차 미사일’이라며 사격 준비 과정과 발사 모습, 목표가 피격돼 파괴되는 장면까지 공개했다. 이후 사우디군 병사들은 ‘현궁 인증’ 영상을 SNS에 하나 둘 올리기 시작했다. 크고 느린 전차를 잡는 용도로 개발된 현궁 미사일은 고속으로 달리는 후티 반군의 지휘관 차량은 물론, 카탈로그 사거리보다 먼 3㎞ 밖에서 빠르게 질주하는 오토바이까지 족집게처럼 잡아내며 위력을 과시했다.
이 같은 ‘현궁 인증’은 사우디군뿐 아니라 후티 반군 진영에서도 나왔다. 후티 반군은 노획한 현궁으로 사우디 진지와 차량을 공격하는 영상을 촬영해 SNS에 게재했다. 후티 반군이 현궁으로 자국군을 공격하자 사우디는 더 많은 현궁을 일선에 보급해 차량이나 건물, 진지 등 의심 가는 목표물에 대량 발사하기도 했다. 현궁은 사용이 간편해 복잡한 교육이 필요하지 않고 휴대성도 좋다. 게다가 명중률과 위력도 발군이라 일선의 입소문을 타면서 예멘 내전을 계기로 중동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때문에 현궁은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UAE)에 수출됐고, 사우디와 밀접한 협력 관계인 예멘 정부군, 아제르바이잔군도 이를 운용하고 있다.
美 하이마스 뛰어넘는 천무 성능
천무는 보병 휴대용 장비인 현궁처럼 쉽게 유통될 수 있는 무기가 아니지만 사우디는 물론 UAE에서도 기존 다연장로켓 장비를 뛰어넘는 성능과 신뢰성으로 큰 호평을 받고 있다. 만약 사우디군의 이번 후티 반군 공격이 실제로 천무로 이뤄진 것이라면 성공적인 실전 데뷔로 현궁처럼 ‘입소문’을 타 추가 수출이 성사될 가능성이 크다. 현궁 성능은 비슷한 무기체계로서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미국 ‘재블린’ 상위호환이다. 천무 역시 미국 MLRS나 ‘하이마스(HIMARS)’를 압도하는 성능과 경쟁력을 갖췄다. 천무는 MLRS보다 기동성이 우수하고, 하이마스보다 다양한 탄약을 더 많이 운용할 수 있다. 자동화된 사격통제장치를 갖춰 발사 준비 시간과 사격 후 진지 이탈 소요 시간도 짧다. 다연장로켓으로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폴란드 수출 사례에서 증명된 것처럼 MLRS나 하이마스보다 우수한 데다 가격이 저렴하고 납기도 빠르다.
사우디가 이번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후 보인 행보를 이어간다면 후티와 평화협상은 물 건너갈 것이다. 국경에 배치된 천무의 실전 사용 빈도도 늘어날 테다. 과연 천무가 현궁이 그랬던 것처럼 중동 지역에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르고 세계 최강 다연장로켓 시스템으로 입소문을 타 추가 수출의 물꼬를 틀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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