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부에 감세 정책은 적지 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지난해 10월 당시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감세안을 철회하며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은 바 있다. 당초 무리한 감세안을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년가량 지나 리시 수낵 총리가 다시 일종의 ‘감세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이번에는 약 200년 이어온 상속세를 수정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대신 정부는 발표에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영국 내에서 찬반 여론이 시끌시끌하기 때문이다.
● 버티던 수낵 내각, 감세 검토
영국에선 현재 32만5000파운드(약 5억2600만 원)를 초과하는 부동산에 대해 40%의 상속세가 부과된다. 더타임스 등 영국 언론을 종합하면 영국 정부는 상속세율을 40%에서 절반으로 낮추고 소기업 세 부담을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제러미 헌트 재무부 장관은 22일(현지 시간) 예정된 가을 예산안 발표에서 상속세율을 현재 40%에서 30%나 20%로 인하하고 과세 문턱을 높이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더타임스가 17일 보도했다.
수낵 내각은 그간 보수당 내부에서 감세를 하라는 압박에 반대하며 버텼다. 하지만 이번에 감세에 호의적으로 돌아선 것은 우선 물가상승률 둔화 때문이다. 곳곳에서 감세 요구가 나올 때마다 수낵 내각은 ‘물가가 높은데 감세를 하면 물가를 더 자극할 수 있다’는 논리로 반대했다.
그런데 최근 물가상승률이 예상보다 빨리 하락했다. 영국 통계청(ONS)에 따르면 10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4.6%였다. 전달(6.7%)보다 크게 둔화된 수치로, 2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이 수치는 이에 앞서 로이터통신이 예측한 4.8%보다도 낮았다. 트러스 전 총리가 감세안을 발표할 당시보다 물가 여건이 훨씬 호전된 것이다.
여기에 세금이 예상보다 많이 걷혔다. 영국 싱크탱크 레졸루션 파운데이션에 따르면 정부 재정 여유분은 130억 파운드(약 21조 원)다. 물가상승률이 예상보다 빠르게 둔화되며 정부의 차입 비용 부담이 비교적 줄고, 가계의 임금이 최근 오르면서 세입이 는 것으로 분석된다. 보수당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하락하고 있는 지지율을 붙잡아야 한다는 절박함도 작용했다. 부유한 보수당 유권자들이 상속세 폐지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 “상속세 과세 대상은 4% 미만”
실제 영국 유권자들 상당수가 상속세 폐지를 원하고 있다. 영국 여론조사기관 입소스가 올 7월 18세 이상 성인 107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인들은 가장 불공정한 세금으로 상속세를 꼽았다. 응답자의 43%는 세금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했고, 23%만이 공정하다고 생각했다. 백만장자인 나딤 자하위 전 재무부 장관은 상속세 폐지 운동을 하면서 “죽음과 함께 우리를 괴롭히는 또 다른 유령”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들이 상속세에 이렇게 반대하는 이유는 ‘이중과세’란 인식 때문이다. 이미 과세된 소득으로 구입한 자산에 대해서 또 과세하는 건 불공평하다는 논리다. 게다가 상속세 제도가 너무 복잡하다는 불만도 상속세 폐지 여론에 힘을 싣고 있다.
하지만 상속세 폐지에 반대하는 여론도 상당하다. 이들은 국민 대다수가 고물가와 고금리 속에 과세 부담까지 안고 있는데 부유층만 세금 부담을 덜어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상속세 과세 대상은 극히 소수의 부유층에 불과하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과세 대상의 4% 미만만 상속세를 부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최근 일부 학자들은 공동으로 20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투고해 “우리의 조세 제도는 상속세 인하가 아니라,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싱크탱크인 브라이트블루의 토마스 널컴 연구위원은 “일반 노동자들이 과세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데 가장 부유층만 내는 세금을 삭감하는 건 정치적, 도덕적, 경제적으로 잘못됐다”고 정부를 비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연구에 따르면 부자에 대한 세금을 줄이면 장기적으로 불평등이 커지지만 경제성장에는 눈에 띄는 영향이 없다”며 상속세 감면을 반대하는 학자도 있었다.
영국 정부의 곳간에 잠시 여유가 생겼지만 상속세 완화를 논할 만큼 안심하긴 이르다는 시각도 있다. 영국 경제학자 루스 그레고리 씨는 FT에 “총리가 선거 전에 (상속세 감면 등) 약간의 경품이라도 내놓으면 총리의 재정 규칙이 불안정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에서 불거지는 경제 이슈가 부쩍 늘었습니다. 경제 분야 취재 경험과 유럽 특파원으로 접하는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 유럽 경제를 풀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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