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엑스포 개최지 경쟁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아온 나라는 단연 사우디다. 오랜 기간 ‘보수 이슬람 종주국’으로 통했던 무겁고 딱딱한 이미지의 나라가 엑스포 같은 개방적인 국제 행사 유치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새롭게 여겨지는 것. 지금까지 ‘사우디=국제적인 행사’는 성립되기 어려운 공식이었다.
사우디가 2030 엑스포 유치에 진심이란 건 여러 부분에서 이미 드러났다.
6월 파리 인근 이시레물리노에서 열린 2030 엑스포 유치를 위한 경쟁 프레젠테이션(PT) 때는 왕실 인사인 파이살 빈 파르한 알 사우드 외교부 장관(왕자)과 리마 빈트 반다르 알 사우드 주미 사우디 대사(공주)를 중심으로 칼리드 알 팔레 투자부 장관, 이브라힘 알 술탄 리야드 시장 등 ‘실세 인사’들이 대거 발표자로 나섰다. 당시 한 중동 전문가는 “사우디 왕실에서 가장 글로벌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2030 엑스포 유치에 앞장선 모양새”라고 평가했다.
최근에도 사우디는 아프리카 국가들을 상대로 대규모 개발 차관과 원조 기금을 제시하며 ‘한 표’를 호소하고 있다.
물론 한국에선 부산이 개최지로 선정되길 바라는 마음이 가장 강하다. 한국 정부와 재계도 상대적으로 늦게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2030 엑스포 유치에 총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석유의 나라’, ‘이슬람 성지’란 폐쇄적인 이미지 덕분에(?) 2030 엑스포 유치 경쟁에서 사우디를 향한 국제사회의 관심은 계속되고 있다.
● 사우디 왕세자의 ‘관심 프로젝트’
사우디가 2030 엑스포 유치에 공을 들여온 배경에는 차기 사우디 국왕이며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으로 통하는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 왕세자가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중장기 경제·사회 발전 계획인 ‘비전 2030’을 통해 현재 석유에 철저히 의존하고 있는 사우디 경제의 체질 개선을 2030년까지 이루겠다고 강조해 왔다.
‘사막의 다보스 포럼’으로 불리는 미래투자이니셔티브(FII) 포럼 설립, 네옴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한 서부 지역의 대대적인 개발, 일반 관광객을 위한 관광 비자 도입, 문화콘텐츠 산업 육성 등이 무함마드 왕세자가 ‘사우디 실세’가 된 뒤 시도한 정책들이다. 하나 같이 사우디의 비석유 산업 육성과 관련 있는 조치들이기도하다.
2030 엑스포 유치도 연장선상에 있다.
특히 2030 엑스포는 시기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추진해 온 개혁·개방의 결과물을 대내·외로 과시하는, 즉 ‘비전 2030의 성공’을 보여주는 이벤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30 엑스포가 사우디에서 열리게 되면 무함마드 왕세자가 국왕으로 이 행사에 등장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의미 있는 대목. 무함마드 왕세자의 아버지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은 현재 88세다.
● 기업·투자 유치에 필요한 매력 자산
2030 엑스포 개최만으로 사우디가 대단한 경제 효과를 누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해외 기업과 투자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는 사우디로서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나라’, ‘기업하기 좋은 나라’란 인식을 제대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엑스포 개최는 이런 국가 브랜드를 만드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술은 물론이고 대중문화와 국제적인 이벤트도 제대로 즐길 수 없는 ‘답답한 분위기’의 사우디에서 장기간 기업 활동을 한다는 건 아직 잘 와 닿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수한 해외 인력을 유치하는 데 지금의 사우디 모습은 매력적이지 않다.
이권형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센터 소장은 “사우디가 경제 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기업과 투자 유치고 이를 위해서는 국가의 매력 자산을 늘려야 한다”며 “엑스포를 포함한 국제적인 행사 개최는 국가 브랜드와 문화 수준을 높이고, 나아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데 필요한 소프트웨어 역량을 키우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사우디는 2030 엑스포 외에도 국제적인 이벤트를 대거 유치했다. 2029년 동계아시안게임(네옴시티)과 2034년 아시안게임(리야드)을 이미 유치했다. 2034년에는 사우디에서 월드컵도 열릴 예정이다.
● 2019년 시동 건 관광산업 육성에 호재
네옴시티와 서부 개발 프로젝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관광 산업 육성에도 2030 엑스포 유치는 의미 있는 성장동력이 될 수 있다.
사우디의 관광 개방은 2020년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지며 힘을 잃었다.
그러나 사우디는 과거 무슬림만 방문 가능했던 메디나를 비무슬림도 갈 수 있게 제도를 완화하는 등 지속적으로 개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메카는 여전히 무슬림만 방문 가능). 또 고대 유적지가 있는 알울라 지역과 휴양지로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는 홍해 일대에 대한 개발 프로젝트도 계속 진행해왔다.
사우디가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의 대규모 콘서트를 각각 2019년과 올해 허용했고, 지난해 11월 리야드에 서양식 테마파크인 ‘블러바드 월드’를 개발한 배경에도 관광산업 육성 의지가 담겨 있다.
사우디 관광청 관계자는 “사우디 관광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크고 작은 프로젝트가 계속 추진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2030 엑스포와 2034년 월드컵은 사우디 관광의 매력을 대대적으로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 인권문제 부각 등 우려와 과제도 많아
일각에선 사우디가 2030 엑스포 유치에 성공할 경우 국제 인권단체 등이 지속적으로 문제 삼아온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지 않는 낮은 인권의식, 외국인 노동자 차별, 정책 불안정성이 더욱 부각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중동 국가 최초로 2022년에 월드컵을 유치했던 카타르, 다양한 메가 개발 프로젝트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온 아랍에미리트(UAE)도 그동안 인권, 외국인 차별 등의 문제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앞으로 2030 엑스포를 포함해 사우디가 다양한 국제 행사를 개최한다고 해도 이전처럼 ‘외국 기술과 인력’에 의존하는 방식에서 못 벗어난다면 소프트웨어 역량 키우기에 한계가 있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단순 개최에만 초점을 맞추고 실질적인 역량 쌓기 작업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결국 ‘보여주기 이벤트’에 그칠 것이란 지적이다.
이 소장은 “사우디가 개혁과 개방을 통해 경제 체질을 바꾸고자 한다면 자국 인력들의 수준도 높여야 한다”며 “국제 행사 개최의 경우 기획과 운영 등의 과정에서 인력과 제도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릴 수 있도록 체계적인 계획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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