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하마스는 11월 22일(현지 시간) 나흘간 임시휴전을 하고, 하마스가 억류하고 있는 인질 50명을 석방하기로 합의했다. 협상 과정에서 하마스는 5일간 휴전을 요구했고, 이스라엘은 “휴전은 필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다가 ‘3일간 휴전, 인질 50명 석방’ 안을 제시했다. 절충점을 찾아 4일간 휴전하게 된 것인데, 협상 기간 양측 태도를 보면 이스라엘이 명백한 ‘갑’이었다. 이는 이번 전쟁에서 하마스가 바라던 전과(戰果)가 나오지 않고 있음을 방증한다. 임시휴전 직전 하마스의 당면 과제는 자신들이 사실상 통치하는 가자지구를 이스라엘이 점령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하마스로선 자기네는 없고 이스라엘군만 가진 전차, 장갑차 등 기갑장비를 최대한 많이 파괴하는 게 관건이다. 하마스가 수세에 몰린 것은 대(對)전차전이 뜻대로 안 풀리는 데서 기인한다.
‘SNS 생중계’ 시대 연 러시아-우크라이나戰
1991년 걸프 전쟁이 ‘뉴스로 생중계되는 전쟁’ 시대를 열었다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생중계되는 전쟁’ 시대를 열었다. 정보통신기술 발달과 스마트폰 보급으로 최전선의 전투 상황을 지구 반대편에서 거의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전장에서 직접 싸우는 장병들도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상급부대가 알려주지 않는 전황을 SNS를 통해 파악하기도 한다. 인터넷 공간은 정보 공유의 장이자 치열한 선전전의 공간이 됐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지금도 거의 매일 일선 장병들이 스마트폰이나 드론으로 촬영한 적 전차·장갑차 파괴 영상을 SNS에 올리며 승전을 주장하고 있다. 갖은 선전과 조작이 난무하다 보니 이제 영상을 분석해 촬영된 좌표와 시간은 물론, 파괴됐다는 전차가 정확히 어느 부대 소속인지 추리해내는 전문가마저 생겼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촬영된 전차·장갑차 파괴 영상은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다. 우선 상대방 기갑차량을 확인해 대전차 미사일이나 로켓을 발사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대전차 무기가 명중한 기갑차량은 불길에 휩싸이거나 엄청난 폭발과 함께 포탑이 날아간다. 기갑차량 승무원이 운 좋게 살아났다면 탈출하는 모습이 관측되기도 한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선 이처럼 ‘식별→피격→폭발→파괴 확인’이 모두 담긴 영상만 ‘적 기갑차량 파괴’ 전과로 인정받는 분위기다.
적 장비를 파괴하는 영상을 찍어 공개하는 선전전 양상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도 나타난다. 양측은 매일 치열한 전투 장면을 촬영해 SNS에 올리고, 전황이 자기네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하마스는 다양한 대전차 무기로 이스라엘 전차와 장갑차를 공격하는 모습을 찍어 대대적인 선전전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하마스의 영상은 하나같이 우크라이나나 러시아가 공개하는 영상과는 다른 묘한 특징이 있다. ‘식별→피격→폭발→파괴 확인’에서 마지막 단계가 빠져 있는 것이다.
하마스 무장조직 알카삼 여단은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지상전을 시작한 이후 그들의 전차와 장갑차 수백 대를 파괴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보유한 북한제 ‘불새-2’ 대전차 미사일이나 RPG-7 대전차 로켓으로 이스라엘 기갑차량을 공격하는 영상을 매일같이 공개하고 있다. 이 영상들의 공통점은 전차나 장갑차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는 대목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하마스 측 주장대로 이스라엘은 정말 지난 한 달여 동안 지상전에서 기갑차량 수백 대를 잃었을까.
제대로 된 전차·야포 없는 하마스
하마스에는 제대로 된 전차나 야포가 없다. 이들이 사용하는 대전차 무기는 대전차고폭탄(HEAT) 탄두를 사용하는 미사일 또는 로켓, 여러 발의 박격포탄이나 폭약을 조합·개조해 만든 급조폭발물(IED)뿐이다. 이스라엘군 전차·장갑차는 강철과 세라믹, 텅스텐 등 특수합금으로 만들어진 복합장갑으로 돼 있어 보통 폭발물로 파괴하기 어렵다. HEAT 탄두는 성형작약, 즉 탄두 내 폭약을 오목하게 성형해 폭발 에너지를 특정 방향으로 집중시키는 지향성 폭약이다. 먼로-노이만 효과를 이용한 HEAT는 탄두가 폭발하면 한 방향으로 모든 폭발력이 집중된다. 이로 인해 고온·고압의 금속 제트기류가 발생해 장갑판을 관통한다. 장갑이 얇다면 이 금속 제트기류가 기갑차량을 불바다로 만들어 그 안의 탄약을 유폭시키고, 장갑이 두껍다면 충격파로 차체 내벽을 박리(剝離)해 승무원을 살상한다. 즉 하마스가 정말 대전차 무기로 이스라엘 기갑차량을 수백 대 파괴했다면 지금쯤 이스라엘군은 전차병이나 기계화보명만 해도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1000명 넘는 사상자를 냈어야 한다. 이스라엘군 전차에는 4명, 장갑차에는 12명씩 탑승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매일 전사자가 발생할 때마다 어느 부대의 누가 어디서 어떻게 전사했는지를 언론과 유가족에게 실시간 통보한다. 병력 상당수가 휴대전화를 가진 예비군 대원이기 때문에 전사자나 부상자 발생을 숨길 수도 없다. 11월 21일 기준 가자지구 시가전에서 전사한 이스라엘 장병은 68명이다. 이들은 대부분 보병이고, 주택 밀집 지역에서 교전 도중 전사했다. 하마스의 공격을 받은 기갑차량에서 이스라엘군 장병이 ‘폭사’한 사례는 지금까지 단 한 건이다. 10월 31일 자발리아 난민캠프 외곽에서 단독 작전 중 하마스가 발사한 ‘야신-105(Yasin-105)’ 로켓에 파괴된 제84 ‘기바티’ 여단 소속 나메르 장갑차다. 그렇다면 하마스가 이제까지 “이스라엘군의 기갑차량을 격파했다”며 공개한 수많은 영상 속 폭발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이스라엘군이 11월 5일 가자지구 북부 해안 지역을 진격하면서 촬영해 공개한 메르카바 Mk.4M 전차 소대의 교전 영상에 그 비밀이 담겨 있다. 이 영상에는 이스라엘군 전차 2대가 등장한다. 촬영자가 탄 전차의 11시 방향에 있는 동료 전차가 적진지를 기관총으로 공격하던 중 측면이 큰 폭발에 두 번 휩싸인다. 포탑이 피격돼 발생한 폭발이었다면 전차는 파괴되고 내부 승무원 모두 죽었을 테다. 하지만 이 영상에서 공격받은 전차는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히 다시 움직이며 적진으로 사격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 전차 포탑 측면에 능동방어장치(APS) ‘트로피(Trophy)’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트로피는 일종의 ‘미니 이지스 시스템’이다. 기갑차량 외부에 4면 고정식 위상배열레이더를 설치하고, 임무컴퓨터와 요격탄 발사기를 연동한 방어 시스템이다. 트로피는 레이더로 주변을 감시하다 고속으로 접근하는 금속 물체를 식별하면 그 방향으로 요격탄을 쏴 격추한다. 실전에서 여러 차례 검증된 방어 장비로, 반응 속도가 빠른 게 특히 강점이다. 약 10m 거리에서 기습 발사된 RPG-7을 감지해 RPG-7은 물론, 로켓을 발사한 사수까지 폭사시킬 정도다. 하마스가 공개한 영상 속 이스라엘군 전차·장갑차 폭발 모습은 APS 요격탄에 맞은 대전차 무기가 터지면서 발생한 것이다.
하마스가 격파했다는 기갑차량 수백 대 어디?
하마스가 주장하는 이스라엘군 기갑차량 격파 전과는 수백 대에 달하지만, 가자지구 어디에서도 파괴된 메르카바 전차나 나메르 장갑차는 목격되지 않고 있다. 하마스 측 주장이 사실이라면 팔레스타인 주민 수십만 명이 있는 가자지구 전투 현장에서 불타는 이스라엘군 전차나 장갑차가 발견되지 않을 리 없다. 파괴된 전차나 장갑차는 오히려 이스라엘 측에서 솔직하게 공개하고 있다. 개전 첫날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파괴됐거나, 시가전에서 고위력 IED나 대전차 지뢰를 밟아 파손된 차량들이다. 하마스가 실제 전투에서 격파한 이스라엘군 전차나 장갑차는 없다시피 하다는 얘기다.
구매 주체와 물량에 따라 다르지만 트로피 가격은 전차에 설치되는 비용까지 합하면 약 90만~120만 달러(약 11억7000만~15억6000만 원)다. 요격탄과 후속군수지원까지 함께 계약할 경우 세트당 200만 달러(약 26억 원)에 달하는 고가 장비다. 게다가 많은 전력을 소모하는 레이더와 별도 통제 시스템도 함께 장착해야 하기에 아무 차량에나 붙일 수 없다. 이스라엘이 이처럼 고가 장비를 전차와 장갑차 대부분에 장착한 이유는 ‘사람이 귀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1948년 ‘건국전쟁’(제1차 중동전쟁) 때부터 수적으로 엄청난 우위인 아랍 국가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싸워온 이스라엘은 한 사람 한 사람 전사자가 나올 때마다 사회 전체가 크나큰 심리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이집트군의 대전차 미사일 공격에 혼쭐난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기갑장비의 생존성을 강화하는 데 많은 투자를 했다. 트로피도 이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등장한 방어 시스템으로, 2010년부터 실전 배치됐다. 첫 등장 때 어지간한 장갑차 1대 가격이던 트로피는 2011년 가자지구 일대에서 첫 실전을 치렀다. 당시 트로피가 성공적으로 전차를 보호하면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에 이스라엘군은 전선에 배치된 거의 모든 전차와 장갑차에 트로피를 장착했다. 최근에는 일반 차량에 장착하기 위한 경량화 버전도 나왔다.
한국은 이스라엘처럼 병역자원이 대단히 귀한 나라다. 분단국가이자 세계에서 전쟁 발발 가능성이 손꼽힐 정도로 높은 국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군인을 비하하고 천대하는 삐뚤어진 사회적 풍토가 만연해 있다. 병역의무를 수행하는 것에 자부심을 갖기 어렵고 군의 사기도 높지 않다. 정치권에서는 장병 처우 개선과 사기 고양을 위해 월급을 올려주는 등 선심성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군 장병들이 실제 전장에 나갔을 때 그들의 목숨을 지켜줄 장비를 도입하는 데는 대단히 인색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장비를 구매해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한국군은 K2 전차 개발 과정에서 이미 트로피 못지않은 K-APS를 개발해 성능 실험까지 마쳤다. 그러나 당시 K-APS 가격은 장갑차 1대 가격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한국군은 훌륭한 성능의 APS를 개발해놓고도 예산 부족, 교리·전술 미비 등을 이유로 도입을 보류했다. 이 때문에 K-APS가 개발된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아직 어떤 전차나 차량에도 탑재되지 않았다. 현재 K-APS 한 세트 가격은 20억 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대당 17억 원인 K808 장갑차보다 비싸다. 그러나 이 장갑차에 타는 12명의 장병 목숨을 생각한다면 결코 비싼 게 아니다. 북한이 가진 모든 유형의 대전차 무기에 종잇장처럼 뚫릴 장갑차 K808 1대를 덜 사는 대신 K-APS를 구매해 다른 장갑차에 붙이는 게 더 낫다.
유사시 북한 대전차 무기의 위협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장을 보도한 영상을 보면 양국 장병들이 옛 소련제 장갑차 외부에 위태롭게 걸터앉은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일선 장병들은 구형 장갑차가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장갑차를 방호 수단이 아닌, 그저 이동 수단으로만 쓰고 있다. 장갑차에 타고 있다가 대전차 무기에 피격되면 탈출할 새도 없이 죽기에 차라리 적 총탄에 맞을 각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방어력이 약한 것은 한국군의 K200이나 K808·806 장갑차도 비슷한 실정이다. 북한은 하마스는 물론, 러시아군이나 우크라이나군보다 훨씬 많은 대전차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유사시 한국군 장병은 그 위협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다. 대당 50억 원이 넘는 K1 계열 전차, 100억 원에 육박하는 K2 전차, 35억 원인 K21이나 12억~17억 원인 K806·808 장갑차 중 어느 것도 북한군 대전차 무기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무방비 상태의 기갑차량이 대전차 무기에 맞으면 폭발하고, 그 안에 있는 승무원 모두가 사망한다. 군 장병 모두 누군가의 사랑하는 가족이자 소중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위정자들이 정말 국민과 군 장병을 위하고 걱정한다면, 이번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교훈을 가슴 깊이 새겨 행동에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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