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의 장막’ 열고 ‘데탕트’ 이끈 키신저 전 美국무 별세…향년 100세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1월 30일 11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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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외교의 거목인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사진)이 29일(현지 시간) 별세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향년 100세.

냉전시기 ‘핑퐁 외교’의 주역이면서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주도했던 키신저 전 장관은 7월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는 등 최근까지도 왕성한 행보를 보여왔다.
키신저 전 장관만큼 미 외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정치인도 드물다. 그는 1970년대 초반 냉전 갈등이 세계를 지배했던 시절 ‘죽의 장막’을 열어젖혔다.

러시아와의 군비확대 경쟁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해 전략무기협정을 체결해 데탕트를 모색했으며 당시 미국의 최대 골칫거리였던 베트남전 휴전협정을 유도했다. 그는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한국과도 친했던 그는 한미 관계 발전에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되는 벤플리트상을 2009년 수상했다. 90세가 넘어서도 해외 순방을 멈추지 않고 시 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정기적으로 만나는 등 말년까지 영향력을 보였다.



키신저 전 장관이 존경을 받는 것은 단지 외교적 업적뿐만이 아니다. 그는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방인으로 현대 외교사의 거인으로 우뚝 선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기도 하다.

키신저 전 장관은 1923년 5월 27일 독일 북부 퍼스(Furth)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유대인으로 어머니는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으며 아버지는 교사였다. 어린 시절 그는 하루 2시간씩 유대교 율법집인 탈무드를 공부할 정도로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다.

그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책에 빠져 산다”며 “좀 더 활발했으면 좋겠다”고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소수 정예 학생들이 입학하는 인문계 중고등학교 김나지움에 들어가는 꿈을 키우며 공부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이 부상하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유대인 차별정책으로 인해 김나지움 입학은 불가능해졌다. 10대 소년이었던 키신저는 유대인 박해를 견디며 살았다. 축구를 좋아했던 그는 소년 축구 클럽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가입할 수 없었다. 유대인 금지 규정을 어기고 몰래 경기장에 들어가 경기를 관람하다가 나치 당원들로부터 몰매를 맞기도 했다.

당시의 기억은 키신저 전 장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길거리를 지날 때마다 ‘더러운 유대인’이라는 욕을 들어야 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화가 나고 억울했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미국에 건너와서도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뒷걸음을 쳤다. 독일에서 나치 당원들에게 맞은 기억 때문이었다.

나치즘이 점점 기세를 올리고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그의 부모는 1938년 미국행을 결심했다. 키신저가 15세 때였다. 그의 가족을 배를 타고 런던을 거쳐 뉴욕에 도착했다. 돈 없이 미국에 온 그의 가족은 공장에서 일을 했다. 키신저 전 장관 역시 면도용 브러시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미국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독일 분위기가 나는 중간 이름 ‘하인즈’를 버렸다. 그는 뉴욕의 조지워싱턴 고교에 입학해 빠르게 영어를 배웠다. 교내에서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1940년 뉴욕 시립 컬리지에 입학한 뒤에는 회계사가 돼 가정을 돕겠다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키신저의 꿈을 바꿔 놓았다. 1943년 미국 시민이 된 그는 곧바로 전쟁에 징집됐다. 미국에 온지 5년 만에 자신의 고향 독일에 대항해 싸우게 된 것. 그는 처음에는 프랑스에 소총병으로 파견됐으나 유창한 독일어 실력 덕분에 곧바로 독일 정보수집 임무를 맡게 됐다.

키신저는 독일 하노버에 침투해 게슈타포 장교들의 전쟁 기밀을 감청하는 역할을 맡았다. 유명한 발지 전투에서 독일군 공격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자청해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는데 큰 공적을 세웠다. 일등병으로 군에 입대했던 그는 사령관으로 초고속 승진했으며 청동 무공훈장을 받았다. 탁월한 정보 수집과 분석 능력을 인정받아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정보 교관으로 활동했다.

전쟁의 최전선에서 외교의 각축 현장을 직접 목격한 키신저 전 장관은 외교 분야 학자가 되기로 마음을 바꾸고 하버드대로 편입해 1950년 최우등생으로 졸업했다. 당시 그가 대학 졸업 논문으로 ‘역사의 의미’라는 주제로 383쪽짜리 연구 논문을 쓴 것은 지금도 하버드대의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키신저 전 장관의 장대한 논문에 놀란 하버드대 당국은 이후부터 대학 졸업 논문은 100쪽 내외여야 한다는 ‘키신저 규정’을 마련할 정도였다. 비록 잘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탁월한 분석력과 직관력을 엿볼 수 있는 그의 대학 논문은 지금도 하버드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954년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바로 하버드대 정부학과 교수로 임용됐고 이후 5년 만에 종신 교수가 됐다. 그는 1957년 하버드대 교수로 있으면서 ‘핵무기와 외교정책’이라는 명저를 발표했다. 이 책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존 포스터 델레스 국무장관의 소련의 공격에 대한 ‘대량 핵 보복’ 정책에 반대하며 재래식 무기와 전술적 핵무기를 사용하는 유엔 대응 전략만으로도 소련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버드대 교수로 있으면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린든 존슨 대통령의 특별고문으로 임명돼 외교정책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키신저는 1969년 하버드대를 떠나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서 국가안보 보좌관과 국무장관으로 1975년까지 일했으며 이후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도 1977년까지 국무장관을 맡았다. 1978년 민주당의 지미 카터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이후 컬럼비아대, 조지워싱턴대 교수를 지내면서 로널드 레이건, 조지 W H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보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1982년 키신저 어소시에이츠라는 정치 자문 및 로비 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2002년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9·11테러를 조사하는 ‘대미 테러공격 위원회(NCTAUUS)’ 위원장으로 임명됐으나 키신저 어소시에이츠 고객과의 이해충돌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자진 사퇴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내 인생을 돌아보면 누가 세계 최강국의 국무장관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독일에서는 유대인 박해로 학교에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미국에 건너와서도 어린 나이에 공장에 다니며 학비를 벌어야 했던 자신이 세계사에 남을 외교인으로 우뚝 선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생전 3권의 자서전의 썼으며 14권의 저서를 남겼다. 자서전 ‘백악관 시절’은 1980년 전미도서위원회 최고의 역사 서적으로 꼽힐 정도로 내용이 알차다.. 정책서 중 ‘미국 외교정책(1969)’ ‘외교(1994)’ ‘중국 이야기(2011)’는 키신저의 3대 명저로 꼽힌다. 가장 최근 저서로는 ‘세계 질서(2014)’가 있다.

두 번 결혼했던 키신저 전 장관은 1남 1녀를 두고 있다.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데이비드 키신저는 외교인이 아닌 방송계로 진출해 제작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장관 시절에도 고향인 독일 퍼스 축구팀의 전적을 매주 챙겼을 정도로 열렬한 축구팬이었다. 그는 2012년 고향을 방문해 퍼스팀의 경기를 직접 관람하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퇴임 후 인터뷰에서 “가장 즐기는 스포츠 게임이 뭐냐”는 질문에 “외교(Diplomacy)”라고 답했다. 그는 평생 외교를 사랑한 미국인이었다.



외교 업적
2013년 초 뉴욕에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90세 생일 축하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그의 외교적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지 보여주는 행사였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텡 전 프랑스 대통령, 수전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존 매케인 상원의원,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등 정재계 거물들이 대거 참석했다. 조지 슐츠, 제임스 베이커, 콘돌리자 라이스, 힐러리 클린턴, 존 케리 등 미국의 전현직 국무장관도 총출동했다. 매케인 의원은 “그는 미국과 세계가 가장 혼란스러웠을 때 외교의 등불을 밝혔다”며 “키신저 전 장관만큼 존경받는 인물을 본 적이 없다”는 축사를 건넸다.

이에 키신저 전 장관은 “미국은 세계의 경찰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은 위기가 닥쳤을 때 세계가 의지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돼야 한다”며 “나는 세계 평화를 위해 미국의 외교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갔다”고 감회를 밝혔다.

2016년 11월 당시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던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에서 승리한 지 열흘도 되지 않아 키신저를 트럼프타워로 초청해 세계정세에 대한 견해를 구한 것도 키신저의 힘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2015년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FP)가 ‘지난 50년간 가장 효과적인 국무장관은 누구였는가’라고 묻자 미국서 활동하는 1615명의 국제정치학자 중 32.2%는 키신저를 꼽았다. 2위 ‘잘 모르겠다(18.3%)’와 3위 제임스 베이커(17.7%)를 압도했다.

실제로 키신저 전 장관이 외교 사령탑으로 있던 1969~1977년은 미국 외교의 최대 전성기였다. 베트남 중국 소련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베트남 칠레 아르헨티나 아프리카 등 미국의 손길이 뻗치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

미국이 지지하는 자유민주주의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효과적인 외교 정책 수립을 위해선 감정이 배제된 가치중립적인 전략 이익 추구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현실주의자 키신저. 그의 3대 외교 업적으로는 중국 방문, 소련과의 무기통제협정, 베트남전 휴전협정이 꼽힌다.

1971년 백악관 안보보좌관이었던 키신저 전 장관은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부터 ‘관계를 재정립하라’는 밀명을 받고 중국을 방문했다. 국무부도 모르는 비밀 방문이었다. 중국은 제2차 대전 후 미국과는 별다른 접촉이 없는 베일 속에 가려진 나라였지만 미국은 소련 견제를 위해 중국과의 관계를 재설정할 필요가 있었다. 키신저 전 장관은 파키스탄 방문 중 비밀리에 중국에 가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마오쩌둥(毛澤東) 주석과 만나 이듬해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켰다. 단 17시간의 체류는 양국 관계를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중국 비밀방문 보고서에서 “우리는 추상적으로 공산주의 국가를 다루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데올로기와 현실정치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는 “이념을 앞세우는 냉전시대 외교과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2016년 12월에도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을 만나는 등 왕성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가 중국을 방문한 횟수는 40회를 넘는다. 그는 2011년 저서 ‘중국 이야기’에서 “국제무대에서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한 미국과 중국은 파트너십이라기보다 함께 앞으로 나가는 공진(共進)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로 국제적 위상에 걸맞게 가능하면 협력하고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상호 관계를 조정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1969년 키신저 전 장관은 냉전시대의 라이벌인 소련과 전략무기제한협정(SALT)를 이끌어내며 데탕트의 서곡을 울렸다. 그는 SALT 협상을 통해 증가 일로를 치닫던 미국과 소련의 공격용 전략미사일 수를 동결시켰다. 당시 그는 주미 소련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 공산당 제1서기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와 비밀 협상을 벌여 미 국무부와 국방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처음에는 베트남전 철수를 반대하며 강경노선을 유지했지만 남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하여 이를 남베트남 군대로 대치하는 ‘월남화’ 정책을 밀고 나갔다. 수개월 동안 파리에서 북베트남 정부와 비밀 협상을 벌인 끝에 1973년 미군을 철수하고 남북 베트남 사이의 평화정착의 토대를 마련하는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베트남 분쟁을 해결한 공로를 인정받아 키신저 전 장관은 북베트남 협상대표 르 둑 토(黎德壽)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토는 수상을 거절했지만 키신저 전 장관은 “겸손하게 상을 받겠다”며 수상했다. 그러나 1975년 북베트남의 공격으로 남베트남이 함락되고 공산화되면서 평화협정은 무용지물이 됐다.

키신저 전 장관의 외교는 중동에서 빛을 발했다. 베트남전 평화협정을 체결하던 바로 그 해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1973년 중동전이 발생하자 키신저 전 장관은 수차례 중동 여러 국가를 방문하는 ‘’셔틀 외교‘를 펼치며 휴전을 유도했다. 키신저 전 장관이 이스라엘에게 이집트 점령지 일부를 반환할 것으로 촉구하면서 1950년대 이후 냉각됐던 미국과 이집트의 관계는 정상화됐다.

외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키신저 전 장관은 평소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19세기 초 오스트리아 수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를 꼽았다. 키신저 전 장관은 메테르니히를 주제로 하버드대 박사 학위 논문도 썼다. 프랑스 나폴레옹에 대적해 주변 4국의 동맹을 주도한 메테르니히의 정치술은 키신저 전 장관의 외교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무리 불완전한 동맹이라고 해도 협력을 통해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세계질서를 지키는 것이 혼돈과 혁명보다 낫다는 키신저의 ‘현실정치(Realpolitik)’는 메테르니히에서 출발했다.

정치학자 로버트 캐플린은 키신저 전 장관을 가리켜 “미국이 펼치고 싶은 것이 아닌, 펼쳐야만 하는 외교정책을 펼친 인물”이라고 평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이상주의가 아닌 냉철한 현실 인식에 바탕으로 두고 미국의 이해관계를 넓히고 세계질서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초점을 뒀다. 뉴욕타임스는 “키신저 전 장관이 미국 외교의 지평을 넓혔고 그의 리더십 하에서 미국 외교가 황금시대를 구가했다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고 평했다.

논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2012년 4월 하버드대를 방문해 특별 강연을 했다. 이 방문은 키신저 전 장관에게는 43년만의 ‘귀향’이었다.

키신저 전 장관은 1969년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에 임명될 때까지 15년 동안 하버드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그러나 하버드대는 그가 1977년 장관 퇴임 후 다시 교수로 돌아오려고 했을 때 받아주지 않았다. 웬만한 유명 동문에게 주는 졸업 축사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 키신저 전 장관도 자신을 냉대하는 하버드대와 담을 쌓으며 지냈다. 이날 강연에서도 일부 청중은 “키신저는 전범이다”라고 외치며 키신저의 하버드 귀환에 반대했다.

하버드대와 키신저 전 장관 간의 반세기에 가까운 냉전은 키신저의 외교 정책 때문이었다. 진보 성향의 하버드대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 전반에서 국익에 바탕을 둔 키신저식 실리 외교는 많은 논란을 낳았다. ‘업적이 많은 만큼 과오도 많다’는 비판이었다.

키신저 전 장관은 1970년 칠레에서 좌익 성향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당선되자 남미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아옌데를 축출하기 위해 피노체트 군사 반란을 지원했다. 피노체트 독재 하에서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면서 키신저의 피노체트 지원은 국제적으로 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는 베트남전 당시 캄보디아 영토를 침입해 활동하는 북베트남군을 봉쇄하기 위해 베트남전에 중립을 지키던 캄보디아에 대한 무차별 폭력을 감행해 킬링필드를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와 함께 키신저 전 장관은 1975년 동맹국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공격해 주민을 학살하는 것을 묵인했다는 논란도 있다. 미국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키신저 전 장관을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를 저지른 혐의로 국제사법재판소에 기소해야 한다”며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실은 전범자라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하버드대 연설에서 이 같은 논란에 대해 “학자는 최상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지만 정책 결정자는 제한된 옵션 중에서 제일 나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해명했다. 전문가들은 “키신저 외교 정책의 과실에도 불구하고 그가 만들어놓은 국제질서가 지금도 상당 부분 유지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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