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께서 대선에 출마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아르티욤 조가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 지휘관)
“결정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선거에 출마하겠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푸틴 대통령(71)은 8일 크렘린궁에서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침공 작전의 러시아식 표현)에 참가한 군인들에게 훈장을 수여한 뒤 DPR 지휘관의 출마 요청에 답하는 형식을 취하며 대선 도전을 공식화했다. DPR은 우크라이나 정권에 맞서 싸워온 친러 분리주의 세력으로, 러시아는 전쟁 발발 이후 이곳을 자국 영토로 편입했다. 푸틴 대통령은 참전 군인의 대선 출마 요청에 수락하는 형식을 취해 5선 도전을 공식화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전쟁의 정당성과 대선 출마 명분을 동시에 확보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다.
러시아 대선은 내년 3월 15~17일 실시된다. 사실상 경쟁자가 없는 푸틴 대통령은 2000년부터 2030년까지 30년간 현대판 차르로 군림하게 됐다. 연임제한 철폐로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도 집권이 가능하다.
● 서방의 ‘전쟁으로 경제 붕괴’ 전망 깨
러시아여론조사센터 브치옴(VTsIOM)이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3일까지 성인 16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푸틴 대통령에 대한 국민 신뢰도는 78.5%로 나타났다. 국정 지지율도 75.8%에 달했다. 언론 장악으로 정부에 비판적인 여론이 적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이같이 견고한 지지율에는 경제 성장이 큰 몫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쟁으로 인한 방산 산업 활성화로 최근 실업률은 1991년 이래 역대 최저치인 3%로 떨어졌다”며 “부상으로 인한 보상금, 군인 급여 등은 국내 수요를 촉진했다”고 분석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서방 제재로) 국내 관광업이 활성화하면서 모스크바 레스토랑은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했다. 전쟁을 시작할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 경제의 붕괴를 예상했다. 하지만 루블화 가치 하락에 따른 외국 노동자의 이탈, 외국기업 철수에 따른 우호국 중심의 교역구조 재편 등은 되레 국내 경제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실제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러시아 경제성장률을 1.5%로 예상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11월 발표한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1.1%로 상향 조정했다.
정치적 여건도 안정화가 된 모습이다. 러시아 민간 용병회사 바그너그룹 전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무장 반란 후 비행기 추락으로 석연치 않게 죽은 것도 결과적으로 러시아 엘리트들에게는 푸틴에 대한 충성도를 더 높이는 계기가 됐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22개월째로 접어들며 서방의 지원 동력이 약화하고 있고,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분산된 것도 호재다.
● 美, “아주 대단한 레이스 될 것” 조롱
푸틴 대통령의 대선 출마 선언에 대한 국제사회 반응은 냉랭하다. 존 커비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8일 “아주 대단한 레이스가 될 것 같다”며 비꼬았다. 우크라이나 외무부는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대선을 치르겠다는 러시아의 의도를 국제사회가 단호히 규탄해야 한다”면서 “러시아에서 실시되는 어떤 선거도 민주주의와 관련이 없다”고 비판했다.
푸틴 정권의 탄압으로 사실상 러시아 야권이 무력해진 상황이지만 수감 중인 대표적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는 ‘나발니의 선거운동 조직’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최대한 반대 여론을 결집하겠다는 의도다.
일각에선 푸틴 대통령의 철권정치가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경험의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비에트 비밀경찰(NKVD)에서 일했던 아버지의 무용담을 들으며 10세부터 국가보안위원회(KGB) 해외첩보 요원을 꿈꿨다. 실제 KGB와 후신 연방보안국(FSB)에서 20년 가까이 활동했다. 거리낌 없이 정적을 제거하는 문화 속에서 내밀한 정보를 바탕으로 러시아 정치와 경제, 사법시스템을 장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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