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팽창주의, 미 고립주의 시대에 “유럽 재래식 전력은 취약”

  • 뉴시스
  • 입력 2023년 12월 12일 14시 41분


독일 탄약 비축 2일 분량, 영국 전차 구식만 150대
프랑스 보유 장사정포 러 한 달 파괴되는 90대 불과
군사비 투자 적고 투자해도 효과 내기까지 오래 걸려

유럽에서 국방비를 가장 많이 쓰는 영국이 보유한 탱크는 150여대, 장사정포는 수십 문에 불과하다. 이처럼 자체 보유 무기가 적은 영국은 지난해 박물관에 보관된 다연장로켓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다가 막판에 취소했다.

두 번째로 국방비가 많은 프랑스도 장사정포가 90문에 불과하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매달 파괴되는 러시아 대포 숫자다. 덴마크는 장사정포가 아예 없고 잠수함과 대공방어시스템도 없다. 독일군은 2일 전투 분량의 탄약만을 비축하고 있다.

이처럼 냉전 종식 이후 수십 년 동안 유럽의 군사력이 크게 약화함에 따라 러시아의 팽창주의가 커지고 미국의 고립주의가 심화하는 상황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전력의 70%를 차지한다.

러시아가 당장 직접적으로 유럽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서방 지도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가 억제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경우 3~4년 안에 문제를 일으킬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오래 전부터 우크라이나는 물론 발트해 국가 등 다른 동유럽 국가들을 아우르는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강조해왔다.

유럽국가들의 무기 생산 능력이 크게 위축돼 있다. 또 유럽 각국은 노령화와 경제 성장 위축 속에서도 복지 지출 감축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해 국방 투자 여력이 거의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럽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안데르스 라스푸센 전 NATO 사무총장은 “NATO 국가들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러시아와 동맹국들을 압도하지만 무기 생산 능력은 오히려 모자란다”면서 “무기 생산이 늘어나지 않으면 전쟁 위협이 갈수록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지원

내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하면 유럽 주둔 미군을 감축하고 유럽국들의 국방비 지출 증가를 강력히 요구할 전망이다.

유럽국들은 우크라이나에 100만 발의 포탄 지원을 약속했으나 생산능력 부족으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패트릭 샌더스 영국 육군사령관은 1937년 영국과 동맹국들이 히틀러에 맞설 것인가를 두고 논란을 벌일 당시를 떠올렸다. “1930년대처럼 전략적 차원의 위협이 커지고 있다. 그렇다면 대비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푸틴이 몰도바와 조지아등 비 NATO 회원국들을 압박하고 발트해국가들에 사보타지 공격을 가하거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의 칼리닌그라드 주둔 러시아 병력을 크게 늘릴 수 있다.

냉전시대에도 유럽의 재래식 전력은 러시아에 크게 열세였다. 대신 핵무기로 러시아의 전략적 공세를 차단할 수 있었다. 마크 세드윌 전 영국 국가안보보좌관은 그러나 오늘날 러시아의 소규모 도발에 핵으로 대응하기가 불가능하므로 재래식 전력이 크게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냉전 시대 NATO 회원국들의 국방예산은 국내총생산(GDP)의 3% 수준이었으나 2014년 1.3%로 줄었다. 러시아가 크름반도를 점령한 2014년 이후 증가세로 전환됐으나 속도가 너무 느리다. 지난 10년 동안 EU 전체의 국방비 지출이 20% 증가했을 뿐이다. 같은 기간 러시아는 300%, 중국은 600%로 늘었다.

냉전 시대 말기 서독의 병력수가 50만, 서독이 30만에 달했으나 통일 독일인 지금 18만에 불과하다. 1980년대 서독이 보유한 전차가 7000여대였으나 통일 독일은 현재 200대를 보유하고 있다. 그마저도 절반만 사용가능한 수준이다. 독일의 전차 생산 능력은 월 3대에 불과하다.

네덜란드는 2011년 탱크 부대를 완전히 해체하고 보유한 탱크를 독일에 넘겼다. 유럽 각국은 냉전 종식 이후 징집제도를 폐지했다.

현재 러시아, 중국, 인도가 유럽의 최대 군사대국인 영국보다 군사력이 강한 것으로 평가되며 한국과 파키스탄, 일본은 유럽 2위 군사 강국 프랑스보다 군사력이 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의 병력은 영국, 독일, 프랑스를 합한 것과 같은 50만 명 이상에 달하며 군수산업은 세계 정상급이다.

◆대 게릴라전 중심

2014년 NATO 회원국들은 국방비를 GDP의 2% 수준으로 늘리기로 약속했으나 31개 회원국 가운데 11개국만 올해 목표를 달성할 전망이다.

독일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1000억 유로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올해 말까지 목표치의 60%만 달성할 전망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거치면서 유럽 각국은 대 게릴라전 대비에 집중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대규모 지상전 능력이 매우 약해졌다.

푸틴은 2005년 즈음부터 아르메니아와 조지아 등 소련 연방의 실지를 회복하는 것이 목표라고 공공연히 밝혀왔다.

그러나 서방국들은 10년 이상 푸틴의 야심을 주목하지 않았다. 다만 러시아와 접경하는 폴란드, 핀란드, 발트해 국가들이 군사력을 빠르게 강화했다. 폴란드는 내년 국방예산이 GDP의 4%에 달할 전망이다. 이는 2022년의 거의 2배에 달하는 액수다. 이에 따라 폴란드는 앞으로 2~3년 안에 유럽 최강의 재래식 전력을 갖출 전망이다.

러시아의 국방 예산은 올해 GDP 3.9% 수준에서 내년 6%로 수준까지 늘어날 예정이다. 소련 붕괴 뒤 가장 높은 수준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는 시점부터 러시아는 3~5년이면 다른 나라를 침공할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러시아의 군수산업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올해 10월까지 무기와 탄약 생산과 관련된 철강제품 생산이 31%, 컴퓨터, 전자제품, 광학제품 생산이 34%, 특수복장 생산이 37% 증가했다. 반면 의약품 생산은 2% 감소했다.

◆너무 느리다

경제성장이 정체된 유럽국들에서 정치인들이 국방비 증액을 추진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고령화에 따른 복지 비용 지출이 빠르게 늘어나면서 재정적자가 커지고 있다.

일부 유럽 당국자들은 NATO군이 기술적으로 러시아를 압도한다고 말하지만 이들이 합동 작전을 펼 수 있을 지는 검증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처럼 작으면서도 잘 훈련된 군대가 러시아의 막대한 군사력에 맞설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가 병력과 장비 면에서 러시아에 크게 열세인 점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미국이 지원을 중단하고 유럽의 지원 능력이 고갈되면 상황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유럽 군수 산업이 러시아의 위협에 맞설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주어져 있느냐다. 당장 투자가 이뤄진다고 해도 군사력을 강화하기까지는 몇 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영국은 잘 훈련된 병력과 최고의 특수부대를 보유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영국의 국방비 지출은 1980년대 중반 이후 GDP의 2.2% 수준에 머물러 왔다. 육군 현대화가 뒤늦게 진행되고 있다. 예산 부족으로 첨단 장비 구매가 늦어진 때문이다.

영국은 1991년 걸프전 이후 기갑 사단의 실전 배치가 불가능하다고 벤 월러스 전 국방장관이 최근 의회에서 밝혔다. 또 탄약 보유량이 최소한에 머물고 있다.

영국은 2020년 대규모 국방비 증액을 발표했으나 육군 병력은 8만2000명에서 7만2500명으로 줄어들 예정이며 탱크 227대를 2027년까지 신형 탱크 148대로 교체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227대 가운데 30일 이내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탱크는 157대이며 즉각 기동이 가능한 탱크는 40대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된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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