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를 여행하면 대형마트 ‘모노프리’, ‘프랑프리’나 ‘나튜랄리아’를 거리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프랑스 유통업을 대표하는 이 세 브랜드는 모두 카지노그룹이 소유하고 있다.
1898년 프랑스 남동부 루아르 지방 생테티엔에서 탄생한 125년 역사의 이 ‘유통공룡’은 이제 내년 초 간판을 내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65억 유로(약 9조2400억 원)에 달하는 빚을 갚지 못해 파산 위기 속에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카지노그룹의 몰락은 한국을 비롯한 다른 유통업계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세계적으로 유통기업들은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때 가속화된 온라인 거래와 고물가로 인한 소비 위축으로 고전하고 있다.
●파산 위기 속 새 주인 찾기
프랑스 유통기업 카지노그룹은 프랑스에만 5만 명 이상, 세계적으로는 20만 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 대기업이다. 이미 125년 전 생테티엔에서 공장형 매장을 세워 초콜릿을 만들고 커피를 내리고 와인 등을 거래하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가족사업으로 꾸준히 성장하면서 1950년대 프랑스 최초로 유통기한을 표기해 식품의 질을 높이는 등 여러 혁신을 거듭했다. 과거엔 업계 선두를 점했지만 급변하는 유통 환경에 대응이 느려지며 지금은 프랑스 마트 점유율 7위다.
프랑스 간판 유통기업이던 카지노그룹은 빚이 65억 유로까지 불어나며 상환 불능 위기에 처하자 올해 7월 구조조정 방안을 마련했다. 구조조정안이 발표된 직후 카지노그룹 주가는 31.5% 급락해 거의 휴지조각 수준이 됐다.
카지노그룹은 올 10월부터 법정 관리에 들어가 새 주인을 찾고 있다. 일간 리베라시옹에 따르면 카지노그룹은 18일(현지 시간) 경쟁 유통기업인 오샹, 엥테르마르쉐와 313개 매장 매각을 위한 독점 협상을 시작했다. 현지 언론들은 내년 1분기(1~3월) 내에 매각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했다. 매각이 완료되면 모노프리, 프랑프리 등 브랜드명은 유지되더라도 카지노그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공룡 기업의 몰락 여파는 상당하다. 카지노그룹 노동조합은 “그룹의 매장이 매각되면 카지노그룹이 해체된다”며 브루노 르메르 재무장관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강경좌파 노조인 노동총연맹(CGT)의 소피 비네 대표도 마크롱 정부의 개입을 촉구했다.
●“외형 확장 위해 과도한 빚 내”
화려한 역사를 자랑했던 카지노그룹이 이 지경이 된 이유는 기본적으로 유통기업들이 수도 파리로 몰려와 출혈 경쟁을 벌이는데 인구는 줄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팬데믹 기간에 관광객들마저 줄어 매출이 타격을 입었다. 팬데믹 이후엔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및 원자잿값이 급등하며 고물가가 이어진 점도 매출을 위축시켰다.
여기에 최근 고금리 장기화도 주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유럽연합(EU) 전반에 걸쳐 기업 부도는 올해 들어 9월까지 전년 동기 대비 13% 증가해 8년 만에 최고치에 달했다.
여기까지는 다른 기업들도 익히 겪었던 문제다. 현지 언론들은 카지노그룹의 전략적 오류를 패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우선 지나친 외형 확장이 문제로 꼽힌다. 카지노그룹은 모노프리, 프랑프리, 나튜랄리아 외에도 비발, 스파, 리더프라이스 등 많은 브랜드를 끌어안았다. 현지 언론 라데페쉬는 “카지노그룹은 경쟁사를 인수해 ‘외부 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빚을 내 인수 자금을 조달했다”고 설명했다. 카지노그룹은 이론적으로 외적으로 빠르게 성장하면서 거둔 이익으로 불어난 부채를 해결할 것으로 판단했지만 현실은 이와 달랐다.
가격 정책이 잘못됐다는 얘기도 있다. 최근 대형마트들도 적극 할인에 나서고 있는 것과 달리 카지노그룹은 가격을 비교적 높게 설정했다는 것이다. 가격이 비싸니 고객이 줄고 매출이 줄자 수익을 높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격을 올리면서 악순환이 계속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쟁사들은 매장 현대화 등 시설 투자에 적극 뛰어들었지만 카지노그룹은 불어난 부채 탓에 투자에 나서지 못한 측면도 있다.
●인플레, 유통 지형 뒤집나
카지노그룹의 몰락을 계기로 대형 유통기업들의 위기의식도 높아지고 있다. 더욱이 고물가가 길어지면서 대형마트 대신 재고처리 매장 등 할인마트의 저가 공세가 위협적이다. 특히 기존 유통기업의 틈새를 비집고 성장하는 기업들은 네덜란드, 독일 등 외국 기업들이다. 프랑스앵포에 따르면 독일계 할인마트 ‘니들’은 작년에만 약 20개 점포를 개장했다. 마찬가지로 독일계 경쟁사 ‘알디’는 2021년 기존 매장 554개를 인수하며 몸집을 불리고 있다.
네덜란드계 재고처리 매장 ‘악시옹’은 10년 전 프랑스에 첫 매장을 연 후발주자이지만 현재 프랑스 매장이 720곳이 넘는다. 올해 한 조사에서 브랜드 인지도 1위를 점했다. 유럽 시장에서 악시옹의 회전율은 지난해 30% 증가했다고 라디오프랑스는 전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에서 불거지는 경제 이슈가 부쩍 늘었습니다. 경제 분야 취재 경험과 유럽 특파원으로 접하는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 유럽 경제를 풀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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