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현지 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약 970㎞ 떨어진 남부 케르만의 순교자 묘지에서 대규모 폭발이 발생해 최소 84명이 숨지고 211명이 부상을 입었다. 당시 이 곳에서는 2020년 1월 미군의 무인기(드론) 공격으로 숨진 가셈 솔레이마니 전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의 4주기 추모식이 열리고 있었다. 솔레이마니는 ‘정부 위의 정부’로 불리는 이란의 무소불위 조직 혁명수비대에서도 최정예 부대로 꼽히는 쿠드스군을 관장하며 시리아, 예멘, 이라크, 레바논 등 중동 각지의 시아파 친(親)이란 무장조직을 후원한 실세였다.
폭발이 누구 소행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란은 즉각 이스라엘과 미국을 배후로 주목했다. 반면 미국은 시아파 맹주 이란과 대립한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소행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스라엘은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폭발 원인이 불분명한 데다 솔레이마니의 상징성을 감안할 때 폭발의 후폭풍이 상당기간 이어질 전망이다. 이란은 최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지난해 10월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것은 솔레이마니 암살에 대한 보복 차원”이라고 밝혔다. 2일 하마스 3인자 살레흐 알아루리가 레바논에서 이스라엘 공습으로 숨진 데 이어 하루 뒤 대규모 희생자를 낳은 폭발까지 발생하면서 중동의 갈등과 긴장이 극에 달하고 있다.
● 이란 “배후는 이스라엘” 보복 천명
이란 국영 IRNA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오후 2시 45분경 솔레이마니가 묻힌 순교자 묘지에서 700m 떨어진 도로에서 첫 폭발이 발생했다. 첫 폭발은 ‘푸조 405’ 차량 안에 있던 여행 가방에 담긴 폭탄이 원격으로 터지면서 이뤄졌다. 20분 뒤에 묘지에서 1㎞ 떨어진 곳에서 또 폭발이 일어났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됐고 곳곳에 사체가 넘쳐났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희생자 추모식을 열고 “시온주의 정권(이스라엘)의 종말”이라며 폭발이 이스라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참석한 군중 또한 “이스라엘에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신정일치 국가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도 “사악하고 범죄적인 적들이 다시 재앙을 일으켰다. 신의 뜻으로 강경 대응을 할 것”이라며 보복을 천명했다. 하메네이는 4년 전 솔레이마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보일 정도로 그를 아꼈다.
● 폭발 주체 미궁…美, 확전 막으려 동분서주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당혹한 기색이 역력하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외교 치적이 필요한 바이든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을 서둘러 종결짓고 싶어 하지만 이날 폭발, 알아루리 사망, 홍해에서 서구 민간 선박을 잇따라 공격 중인 예멘의 시아파 반군 후티 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미국은 이란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이스라엘 소행이 아님을 강조했다. 바이든 행정부 고위 당국자는 미 정치매체 더힐에 “이번 폭발은 과거 IS가 해 왔던 종류의 공격”이라고 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 또한 “이스라엘이 개입했다는 징후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3일 아모스 호치스타인 백악관 선임고문, 4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을 중동으로 급파해 일대의 긴장 완화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슬람권의 분노는 고조되고 있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의 하산 나스랄라 최고지도자는 알아루리의 사망을 두고 “중대하고 위험한 범죄”라며 보복을 시사했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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