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여명 사망 튀르키예 강진 1년
아디야만-말라티아 정착촌 르포
파손건물 4만 채 중 약 85% 정리… 철거 흙먼지가 주민들엔 되레 희망
“형제의 나라 한국 도움에 감사”… 새 주거단지 주택 이달부터 입주
“(컨테이너가) 난방이 잘되지 않아 추워요.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새기도 하고요. 빨리 이사 가고 싶어요.”
일곱 살 소년 타하는 축구 선수가 꿈이다. 지금도 매일 친구들과 정착촌 골목에서 공을 차며 논다. 언젠가는 TV에서만 본 ‘큰 운동장’에서 뛰어보고 싶다. 어른들이 한숨짓는 ‘이재민의 고통’은 잘 모르지만, 7평(약 21㎡) 남짓한 컨테이너에 가족이 한데 모여 사는 생활은 그에게도 버티기 쉽지 않다. 그래도 타하는 “조만간 새 주거단지에 들어갈 거래요. 그날이 너무 기다려져요”라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
2월 6일은 튀르키예 국민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1년 전 이날 규모 7.8의 강진이 몰아쳐 81개 주(州) 중 18곳이 피해를 입었다. 5만3537명이 숨지고 10만여 명이 다친 데다 경제적 손실도 1000억 달러(약 133조 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사이언스지는 지난달 논문에서 지역에 따라 지표면이 2∼6.7m 수평으로 이동했다는 연구 결과를 전했다.
4일 튀르키예 정부 초청으로 방문한 아디야만시(市) 임시 정착촌은 대참사의 여진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깨닫게 했다. 진원지에서 126km 떨어진 아디야만주는 당시 8387명이 목숨을 잃고 건물 7만1688채가 파손됐다. 튀르키예에서는 집을 잃은 약 39만 가구가 여전히 임시 정착촌 414곳의 컨테이너 21만5224개에서 생활하고 있다.
● 폐허가 일상… “아이들 웃음소리가 위안”
아디야만시는 곳곳에 구멍이 나 있었다. 이가 빠진 것처럼 무너진 건물 터가 휑했고, 그나마 남은 건물들도 금이 갔거나 벽이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 재건 중인 건물은 아직 뼈대만 올린 상태였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제 ‘삶의 순리’를 받아들인 듯 친절하고 평온했다. 부서진 창문을 천으로 가려둔 채, 가까이 다가가면 밖으로 손을 내밀고 흔들어 보였다. “함께 사진 찍자”며 반기는 이도 적지 않았다. 뭣보다 어린이들은 생활고에 지친 주민들에게 큰 힘이 돼주고 있다. 빽빽하게 늘어선 컨테이너 사이로 공 차고 자전거 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이곳이 참사 피해지란 걸 잠시 잊게 했다.
앞서 3일 찾은 말라티아시는 사정이 조금 나았다. 주 당국에 따르면 복원 작업이 속도를 내며 파손 건물 약 4만 채 중 85%가 정리됐다. 다만 대규모 철거가 이어지다 보니 도시 곳곳이 흙먼지로 뿌옇게 덮여 있었다.
그래도 매캐한 흙먼지는 주민들에게 다시 삶을 일으킬 희망의 상징이다. 임시 정착촌에서 만난 세팀 아포한 씨(47)는 “세계에서 도와준 덕분”이라며 “특히 형제의 나라 한국에 특별한 감사를 전한다”고 했다. 수줍은 미소를 지닌 네 살 소녀 미라지는 한국에서 보낸 듯한 ‘긍정을 퍼트려 봐’가 한글로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놀거리가 없는 튀르키예 청소년들에게 ‘K컬처’는 위안의 선물이 되기도 한다. 카글라 양(15)은 “BTS(방탄소년단) 음악을 들으며 1년을 버틸 수 있었다”며 “하루빨리 혼자서 BTS를 만끽할 ‘나만의 방’을 갖고 싶다”고 했다. 쿠제이 군(9)은 튀르키예 프로축구팀 페네르바흐체 SK에서 뛰었던 김민재 선수를 기억했다. 소년은 “커서 김민재처럼 근사한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 그의 나라 한국에도 꼭 가보고 싶다”고 전했다.
● 이달부터 이재민 새집 입주하지만…
현재 튀르키예 정부는 정착촌 주민을 위해 전국에 30만7000채의 주택 및 아파트를 건설하고 있다. 이르면 이달 말부터 입주가 시작된다고 한다. 주택들은 이재민들의 소유로, 20년 만기로 천천히 대출금을 갚을 수 있다. 입주 순서는 추첨을 통해 결정된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3일 또 다른 피해지역인 하타이주를 방문해 직접 추첨을 진행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앞으로 두 달 동안 7만5000채의 집이 이재민들에게 인도된다”며 “올해 안에 총 20만 채의 주택을 인도할 계획”이라 밝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재민 39만 가구 중 19만 가구는 다시 또 1년을 버텨야 한다.
희망의 싹은 틔웠지만 아직 과제는 잔뜩 쌓여 있다. 1년째 말라티아 정착촌에 머물고 있는 세브다 씨(31)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 공간이 부족해 육아가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이크라누르 양(12)은 “당뇨병을 앓는 어린 동생을 위한 의료시설이 간절하다”고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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