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최근 2주간 ‘성난 농심(農心)’으로 불타올랐다. 전국 농민 시위대는 지난달 29일(현지 시간)부터 파리 주변 고속도로 8곳을 막았다. 트랙터 800여 대를 동원해 행진하며 “파리를 굶겨 죽이겠다”고 엄포를 놨다.
시위의 정점은 이들이 파리 인근에 있는 유럽지역 최대 식품시장 ‘헝지스’ 봉쇄를 시도할 때였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연금개혁 민심을 들으려 찾기도 했던 이곳은 프랑스 농업, 나아가 유럽 농산물의 상징. 이곳이 봉쇄되면 정말 유럽 농산물 유통이 마비될 위기였다.
결국 1일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가 농업 지원 대책을 내놓고 농민들을 달래며 시위는 중단됐다. 농민들은 도로에서 철수했지만 정부가 대책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시위는 재점화할 수도 있다.
● 佛 농부들이 화난 까닭
프랑스 농부들은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은 낮아 농가가 어려워지며 그간 불만이 누적됐다. 이 와중에 정부가 농업용 경유에 대한 면세 조치를 중단하겠다고 밝히자 시위에 불이 붙었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면세 중단을 통해 경유 사용을 줄여보려는 취지였다. 하지만 농업용 경유는 농업 비용에 주된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농부들은 분노했다.
여기에 정부가 유럽연합(EU) 차원에서 시행하는 규제를 적용하기 시작해 농민 분노를 더 키웠다. 환경 보호를 위해 농업에 살충제 사용을 제한하는 규제, 농경지 일부를 휴경지로 남겨 놓도록 의무화하는 규제 등이다.
무역 정책도 불공정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수입 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와 우리 농업이 힘들어졌다’는 불만이 늘었다. 특히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는 물론이고 동유럽의 농산물이 자국에서 충분한 수요를 찾지 못해 값싸게 해외로 판매되다 보니 프랑스 농업도 타격을 입었다.
프랑스 정부는 비상이 걸렸다. 프랑스는 유럽의 최대 농업국이다. 농업은 프랑스 경제의 생산과 고용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탈 총리는 시위에 앞서 이미 지난달 26일 농업용 경유 면세를 유지하고 각종 행정 절차를 간소화하겠다며 1차 농가 지원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이에 마크롱 대통령은 시위 첫날인 지난달 29일 오후 긴급 내각회의를 위해 장관들을 소집하며 대책 마련에 나섰다.
● 농업 지원 ‘종합세트’ 풀어
정부의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농민들은 1일 아탈 총리가 대대적인 2차 농가 지원 대책을 내놓자 시위 철회를 결정했다. 이 자리에서 아탈 총리는 면세 중단 조치에 대해 “내가 한 실수”라며 “복잡하고 소규모 농장에는 공평하지도 않았다”고 진솔하게 사과했다. 농민들을 달랜 대책의 면면을 살펴보자.
우선 정부는 시위를 촉발한 당면 규제를 중단하기로 했다. 경유에 대한 면세 중단은 정부가 1차 대책 발표 때에 이어 거듭 취소하겠다고 명확히 밝혔다. 살충제 사용 규제도 일시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농가 수익에 직결되는 지원 대책이 나왔다. 정부는 특별한 지원이 필요한 축산업자들에게 올해부터 장기적으로 1억5000만 유로(약 2144억 원)를 풀겠다고 했다. 농민들에 대한 보상을 강화하기 위해 ‘에갈림법’을 강화하겠다는 방침도 내놨다. 에갈림법은 유통업체간 가격 경쟁으로 농가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보호하는 법이다. 또 정부는 농가에 타격을 준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입은 제한하도록 협상에 나서기로 했다.
장기적인 대책도 눈길을 끈다. 정부는 식량주권을 법에 명시해 농업을 보호하기로 했다. 정부의 농업 지원이 지속가능하게 시행되는 기반을 마련하는 셈이다. 또 농업 상속 면세 기준도 완화된다. 인구 감소로 농업이 소멸할 위기에 처한 가운데 젊은 세대가 농업을 상속해 이어가도록 한 조치다.
● EU도 결국 성난 농심에 ‘백기’
프랑스 정부는 물론이고 EU 집행위원회도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프랑스뿐 아니라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그리스 등 곳곳에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EU 집행위는 농민들이 반대하는 농업 온실가스 배출 감축 권장 목표를 폐기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5일 보도했다. 당초 EU 집행위는 6일 2040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90% 감축하는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농업과 관련된 메탄, 질소 및 기타 가스의 30% 감축 방침을 언급하려 했는데 이를 제외한 것이다.
이에 대해 EU가 올 6월 의회 선거를 앞두고 농민들 눈치를 보는 포퓰리즘에 휘둘리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FT는 이날 “6월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극우 정당을 중심으로 반체제 정당의 큰 승리가 예상되는 가운데 중도우파 정당들은 기존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희석시키는 실용적 접근으로 표를 얻고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에서 불거지는 경제 이슈가 부쩍 늘었습니다. 경제 분야 취재 경험과 유럽 특파원으로 접하는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 유럽 경제를 풀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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