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21일(현지 시간) 미국 세너제이 컨벤션센터 연단에 서서 “미 공급망의 재건”, “AI 시대 파운드리 선두주자”와 같은 야심찬 단어를 쏟아냈다.
겔싱어 CEO 뿐이 아니었다. 인텔의 첫 파운드리(위탁생산) 행사 ‘인텔파운드리서비스(IFS) 다이렉트커넥트 2024’에서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은 미 반도체 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하는 반도체법 ‘시즌2’를 예고하며 지속적 투자를 약속했다.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MS) CEO, 샘 올트먼 오픈AI CEO도 얼굴을 내밀었다. 미국 AI 산업 리더들과 미 행정부 핵심 관료까지 총출동해 인텔 지원을 약속한 것이다.
● AI 칩 수요 폭발… 미국이 뭉쳤다
이날 인텔의 발표에서 눈에 띄는 내용은 2027년까지 1.4nm(나노미터·10억분의 1m) 칩 양산에 성공할 것이라는 로드맵과 MS가 인텔로부터 1.8 나노 칩을 사들일 것이란 부분이었다. ‘나노 공정’은 웨이퍼 위에 그리는 각 회로 사이의 폭을 나노 단위로 줄여 칩 성능을 높이는 초미세 공정을 말한다.
현재까지 3나노 양산에 성공한 기업은 TSMC와 삼성전자밖에 없다. 인텔은 과거 7나노 공정에서도 애를 먹어 왔다. 인텔 파운드리의 시장 점유율은 1% 안팎이고, 이에 의미 있는 고객사를 확보할지 여부도 미지수였다.
그런 인텔이 삼성을 넘겠다는 자신감을 보인 것은 미국 AI 생태계라는 든든한 아군을 만났기 때문이다. 인텔은 이날 세계 시가총액 1위로 떠오른 MS를 비롯해 고객사로부터 약 150억 달러(20조 원) 규모 수주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는 AI 산업의 폭발적 성장을 바탕으로 미국이 반도체 생태계 재건에 나서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마침 MS나 오픈AI, 메타 등 미국 AI 빅테크 기업들은 엔비디아 의존도에서 벗어나려 자체 AI 칩 개발에 눈을 돌리고 있다. 맞춤형 칩을 만들어줄 파운드리 파트너도 애타게 찾는 중이다. MS는 지난해 ‘마이아 100’이라는 자체 개발 AI 칩을 공개했는데, 반도체 업계에서는 인텔이 이 칩의 생산을 맡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도 이날 겔싱어 CEO와의 대담에서 ‘AI 칩 기업 설립을 위해 실제로 7조 달러를 모으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핵심은 AI 컴퓨팅을 위해 훨씬 더 많은 칩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美 “1960년대 우주전쟁의 재현”
실리콘밸리 터줏대감 인텔은 2021년 3월 파운드리 산업에 재도전을 선언한 바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 산업의 공급망을 점검하라는 첫 행정명령을 내린 뒤 한 달 만이었다. 이 행정명령은 당시 첨단 반도체가 대만과 한국에서만 생산되고 있다는 우려에서 나왔다.
이후 인텔은 줄곧 바이든 행정부와 ‘원팀’처럼 움직여 왔다. 2022년 바이든 대통령의 반도체법 서명식에는 겔싱어 CEO가 배석했다. 인텔은 이후 오하이오와 애리조나에 총 500억 달러(66조 원) 규모 투자를 약속했다. 미 반도체법 최대 수혜 기업으로도 꼽힌다. 바이든 행정부는 3월 초 인텔에 13조 원대 규모의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반도체 개발과 설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미국은 TSMC와 삼성전자에 빼앗긴 첨단 반도체 제조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향후 인텔에 지속적으로 투자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러몬도 장관은 이날 행사에 화상으로 참석해 “미국 민관이 이렇게까지 전략적으로 나선 것은 1960년대 우주전쟁에 비견할 만하다”며 “미국이 모든 칩을 만들 수는 없지만 AI 시대 필수적인 첨단 칩은 (아시아로부터) 미국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인텔이 삼성전자나 TSMC 기술력을 뛰어넘을 만큼 수율 등을 갖췄는지는 미지수지만 미 빅테크와 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한다면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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