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지난해 3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배상금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하며 한일 관계 개선의 물꼬를 텄지만 일본의 역사 인식은 되레 퇴행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23일에는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들의 위패가 합사된 도쿄 야스쿠니신사에 주요 장관과 국회의원들이 잇따라 참배했다. 앞서 일본 정부는 일제강점기 위안부 동원에 강제성이 없었다는 등의 우익 사관을 담은 교과서에 대해 잇달아 검정을 통과시켰고, 도쿄 인근 군마현은 조선인 강제동원 추도비를 철거하기도 했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위상을 높여주고, 일본은 이를 뒷배 삼아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나아가며 군사대국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역사 인식의 후퇴는 우려스럽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윤석열 정부가 내세운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구축에 대한 한국의 기대가 번번이 꺾이고, 양국 관계 개선에 대한 회의적인 국내 여론이 커진다면 작은 충격에도 한일 관계가 다시 무너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 日의원 94명,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
23일 일본 ‘다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의원 94명은 춘계 예대제(例大祭·제사)를 맞아 야스쿠니신사를 집단 참배했다. 극우 강경파인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경제안보담당상도 같은 날 참배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는 직접 참배하지는 않았지만 21일 공물을 봉납했다.
야스쿠니신사는 도조 히데키 전 총리 등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동아시아를 전쟁의 참화에 빠뜨린 전범의 위패가 합사된 곳이다. 일본 군국주의 상징으로 꼽힌다.
올해 참배 규모는 예년보다 더 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본이 2027년까지 방위비를 애초 계획 대비 2배로 늘리며 미국산 토마호크 미사일을 도입하기로 하는 등 군사대국화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나타나는 퇴행적 모습이라 과거 참배와는 의미가 다르다. 특히 미국은 중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을 인도태평양의 핵심 기지로 활용하고, 일본도 이를 계기로 미국과의 군사일체화에 속도를 내고 있어 브레이크도 없는 모습이다.
최근 일본에선 자위대의 군국주의 추종 움직임마저 드러난다. 올 1월 고바야시 히로키(小林弘樹) 육상막료부장(육군참모차장 격)은 자위대원 수십 명을 이끌고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했다. 방위성은 훈계 처분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이달에는 전 해상자위대 고위 간부가 야스쿠니신사 궁사(우두머리 신관)로 취임했다.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자위대가 방위력 강화의 깃발만 휘두르며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는 상황을 방치한다면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없을 것”으로 우려했다.
● “한일 관계 개선의 동력 떨어질라”
지난해 3월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정상회담을 한 이후 일본을 찾는 한국인 여행자가 늘고 일본에서 한류 붐이 강해지는 등 그 어느 때보다 양국 관계 개선 흐름이 강하다. 하지만 일본은 역사 인식에 있어서는 퇴행적 모습을 계속 보이고 있다. 기시다 총리는 11일 미 의회 합동연설에서 과거사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우파 성향이 강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도 9년 전인 2016년 같은 자리에서 ‘반성’을 언급한 바 있다.
한일 문제 전문가인 오쿠노조 히데키(奥薗秀樹) 시즈오카현립대 교수는 “일본 정부는 한국과 외교적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해야 한다고 여기지만 집권 자민당이 역사 인식까지 한국에 배려하는 쪽으로 바꾼다는 것은 솔직히 기대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하지만 양기호 성공회대 일어일본학과 교수는 “일본이 역사 인식에서 달라진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양국 관계 개선에 대한 한국 국민의 공감을 얻기 어려워 결국 개선 동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역사 문제는 하루아침에 해결되는 게 아닌 만큼 끈기 있게 자료를 모으고 우리의 주장을 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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