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내고 덜 받는’ 연금개혁은 어느 나라에서든 정치인들의 손으로는 이루기 어려운 모양이다. 우리나라 21대 국회에서 연금개혁 합의가 7일 결국 불발된 가운데, 미국에서도 6일(현지 시간) 현 추세대로라면 사회보장 기금이 약 10년이면 고갈될 것이라는 경고가 나왔다.
이날 미국 사회보장국(SSA)은 퇴직연금과 장애연금이 포함된 사회보장 기금은 2035년 고갈되고, 65세 이상 노인과 장애인 대상 공공 의료보험인 메디케어 재정도 2036년 바닥날 것으로 전망했다. 마틴 오말리 SSA 국장은 최근 고용 시장의 호황 등 탄탄한 경제 성장에 힘입어 기금 고갈 시점이 지난해 예상했던 것보다 다소 미뤄졌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국민연금이 가입자들이 낸 보험료로 운영되는 것과는 달리, 미국의 사회보장 제도는 고용주와 노동자가 절반씩 부담하는 급여세(payroll tax)에 기반한다. 양측에게 사회보장 재원으로 6.2%, 메디케어 재원으로 1.45%의 세율이 각각 적용된다. 자영업자는 고용주가 낼 몫도 직접 내므로 소득에서 총 15.3% 이상을 떼어내게 된다.
올해는 경제 호조로 세입이 늘었지만, 전반적인 재정 전망은 인구 고령화로 여전히 암울하다고 외신들은 평가했다. 1983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사회보장연금 제도를 전면 개편한 뒤 사회보장 신탁기금은 약 30년간 흑자였지만, 2021년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는 역전이 이뤄졌다. 이런 추세는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 은퇴 연령에 도달하는 미국인은 약 400만 명으로 사상 최대 수준이다.
물론 기금이 바닥나더라도 연금을 아예 못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급여세 세입만으로 제도를 운용해야 하기에 지급액이 급격하게 깎일 수밖에 없다. 사회보장 연금의 경우 ‘약속했던 금액’의 약 87%만을 지급할 수 있을 것으로 SSA는 예측했다. 메디케어 지급액은 기금 고갈 이후 약 11% 삭감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사회보장 수혜자는 전체 미국 인구의 20%에 이른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7일 “현재 제도의 틀을 유지하려면 ‘더 내고 덜 받는’ 개혁이 이뤄져야 위기를 피할 수 있다”라면서 “하지만 이는 극도의 정치적 위험을 수반하기에 정치인들이 개혁을 미루고 있다”고 비판했다. 여야의 책임 떠넘기기 속에서 17년간 연금개혁 논의가 답보하는 우리나라와 상황은 흡사한 셈이다.
미국은 특히 올해 11월 대통령 선거가 예정됐기 때문에 더욱 상황이 복잡하다. 현재 공화당 유력주자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은퇴 연령 상향 등 사실상 사회보장 축소를 주장한다. 반면 민주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은 부자 증세 등으로 사회보장을 더 강화해야 한다며 상반된 공약을 내놓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양극화된 의회에서 원활한 논의가 이뤄지기 어렵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 때문에 신탁기금 고갈 시기를 늦추기 위해 재원 자체를 넓히는 ‘우회로’가 검토될 가능성이 커진다. 현행대로 급여세에 의존하는 대신 일반 수입(general avenue), 즉 세금 외 수입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WSJ는 “사회보장제도가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인식을 강화하고 국민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된다”라며 의회가 해당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하지만 ‘미래 세대에 책임을 떠넘기는 셈’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로이터통신은 “사상 최초로 사회보장 제도가 국가부채 부담을 늘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찰스 블라우스 전 SSA 공공이사는 “일반 수입을 활용하자는 것은 ‘사회보장 구제금융’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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