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조차 낯선 ‘무명의 규제기관’ 미국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가 미국 청정에너지 정책의 핵심에 섰다. 가스와 석유, 전기의 주(州)간 수송을 감독하는 FERC가 13일(현지 시간) 전국의 청정에너지 송전과 관련해 전력망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기 위한 규칙(rule)을 통과시킨 것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기후정책을 놓고 민주당과 공화당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FERC는 민주당 성향 위원 2명의 찬성, 공화당 성향 위원 1명의 반대로 해당 안건이 가결됐다고 밝혔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FERC는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기관이지만, 이날 가결된 규칙은 바이든표 ‘탈탄소’ 정책을 뒷받침하는 데 꼭 필요한 근거”라고 전했다.
“송전관 노화-극한기후로 전력인프라 한계”
이번 규칙엔 미국 전역에 더 많은 풍력 및 태양 에너지를 송전하기 위해 수천km에 달하는 새로운 고압 전력선을 건설하고 이에 따른 비용 부담을 각 주들이 효율적으로 나눌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전기자동차와 인공지능(AI) 보급, 데이터센터 증가로 전력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는 데다, 해마다 늘어나는 극한 기후에도 대응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우리나라에서는 공기업인 한국전력이 전국의 발전과 송배전 사업을 총괄하지만, 미국에서는 이 시스템이 개별 사업자와 주 정부 등에 복잡하게 분산돼있다. 거대한 땅덩어리를 가로지르는 낡은 전력망은 날씨에 따라 변동하는 청정 에너지원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도 어렵다. FERC의 윌리 필립스 위원장은 “현재 전력 인프라는 한계까지 내몰린 상태”라고 경고했다.
문제는 전력망 개혁 논의가 바이든 행정부의 ‘탈(脫) 탄소’ 공약과 맞물리면서 정치 문제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AP통신은 “전력 회사들이나 공화당이 우세한 주는 재생에너지 비중을 늘리기 위해 송전망을 개선하는 데 돈을 쓰기 싫어한다”라며 “청정에너지를 늘리겠다는 야심 찬 목표의 민주당 우세 주들과 갈등을 빚는 이유”라고 보도했다.
바이든 기후정책 직결된 전력 정책, 여야 갈등의 장으로
청정에너지 장거리 송전시스템은 바이든 행정부의 핵심 정책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직결돼있다. 2022년 8월 발효된 IRA는 기후변화 대응과 청정에너지 공급망 강화에 총 3700억 달러를 쏟아붓는 것이 골자다. 하지만 NYT는 “송전망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IRA가 지원하는 혜택의 절반이 증발할 수 있다”고 전했다. 2035년까지 발전 부문의 탄소 배출량을 0으로 만들겠다는 바이든 행정부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지역 간 송전용량을 5배로 늘려야 한다.
이 때문에 FERC는 기후정책을 둘러싼 여야 갈등의 장이 됐다. 양당 모두 전력망을 확대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민주당은 청정에너지 비중을 늘리고, 공화당은 화석에너지 규제를 완화하려 한다는 점이 다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FERC 위원장을 지낸 닐 채터지는 NYT에 “공화당은 바이든 대통령에 반대하기 위해 반대하는 셈”이라며 “이번 규칙은 IRA 법 성공을 촉진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소속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는 “FERC는 의회에서 공화당의 반발을 우회하는 방안”이라며 “FERC는 우리(민주당)가 요청한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다. 이번 규칙으로 퍼즐의 빈 조각이 채워졌다”라고 말했다. 반면 유일한 반대표를 던진 마크 크리스티 위원은 “FERC가 권한을 넘어서는 정책 변화를 서둘러서 강요하고 있다”라며 “청정에너지 관련 발전 사업자들에게만 이득이 되는 변화”라고 반발했다.
실제 송전선 건설 따른 법적-정치적 장벽 여전
FERC는 192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대통령 때 수력발전 댐을 관리하기 위해 창설됐다. 이후 1970년대 현재의 형태로 권한이 확대돼 전국의 전력 인프라를 관리하는 사실상 유일한 규제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원칙적으로 정원은 최대 5명이지만,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녹색 정책을 두고 양당이 부딪히면서 민주당과 공화당 측 위원이 각각 한 명씩 사임해 3명만 남았다.
FERC가 전력망을 대폭 개편하는 방안을 승인한 것은 2011년 이후 13년만이다. NYT는 “이번에 가결된 규칙이 실제 시행되는 데에는 수년이 걸릴 전망이고, 송전선 건설에 따른 법적 문제도 여전할 것”이라며 환경훼손 등에 대한 소송이 제기될 경우 해결까지 10년 이상이 걸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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