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찾은 미 뉴욕 뉴욕증권거래소(NYSE). 낯익은 얼굴이 나타나자 객장을 찾은 개장 행사 참석자들이 일제히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는 ‘월가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리는 40년 플로어 트레이더 피터 터크먼(67)이었다. 미국 증시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봤을 법한 ‘표정부자’다. 주가에 따라 낙담,좌절, 흥분을 표정에 담아 월가에서 가장 사진이 많이 찍혀 언론에 실린 트레이더로 꼽힌다.
현장에서 마주친 터크먼 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해 13일(현지시간) NYSE 앞에서 다시 만났다. 노란색 후드티, 스니커즈 차림의 터크먼 씨는 테크업계 엔지니어 느낌이었다.
●“다이어트 마지막 2kg 못빼듯…인플레 잡기 난항”
“오늘은 게임스탑이 아침부터 난리고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인사가 추가 긴축을 언급했네요.”
이날은 ‘밈 주식’인 게임스탑이 75% 오른 날이었다. 그는 시장 상황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다 “이번주 미국 소비자물가(CPI)가 실망스럽게 나오면 금리가 인상될 가능성이 살아날 수 있다. 내 직감으론 (물가) 지표만 좋으면 연준이 한번 혹은 두 번 인하할 것”이라고 말했다.
‘언제 연준이 금리를 내릴 것 같느냐’고 묻자 고개를 흔들었다. 이어 “나는 주가 예측에 대해서도 절대 조언하지 않는다. 시장은 하루에도 한 순간에 바뀔 수 있고 내가 틀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유가에 영향을 미치는 두 개의 전쟁이 있다. 일반적으로 시장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약간 영향을 줄 수 있는 대선도 있다”며 요즘과 같은 시장은 40년 베테랑도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연준의 인플레이션 전쟁을 다이어트에 비유하기도 했다. 터크먼 씨는 “35파운드(16kg)를 감량하기로 결심하고 키토와 같은 엄격한 식이요법으로 30파운드(14kg)는 쉽게 뺄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5파운드(2kg) 감량은 매우 어렵다”며 “물가상승률을 마지막 1%포인트 떨어뜨리는 것은 힘든 과정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인공지능(AI)와 관련해선 버블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내가 아인슈타인을 닮았다고들 하지만 그만큼 똑똑하지 않아 월가에서 가장 뛰어난 애널리스트들에게 조언을 구한다”고 웃으며 “마이크로소프트(MS)등 기업들은 수조 원을 투자하고 있고, 내년이면 집에 로봇을 들이는 시대가 올 것이다. AI는 실제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고, 거품이 아닌 진짜다”라고 강조했다.
●1985년 월가에…“위기 4번 겪어”
터먼 씨가 월가에 입문한 것은 28세였던 1985년이다. 거래소에 컴퓨터가 없던 시절 트레이더들이 종이를 들고 서로 고함을 지르며 주식을 거래하던 시기다. 소리 치는 트레이더 사이에서 전보를 작성하는 ‘텔레타이피스트’로 시작했다.
메사추세츠 대학에서 경제학과 농업을 전공한 그는 졸업후 뉴욕에서 레코드 가게를 운영해봤지만 딱히 원하는 일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뭘 해야할지 모르던 그에게 결국 당시 성공한 의사였던 아버지가 월가에서 브로커리지를 운영하던 환자에게 아들의 일거리를 부탁한 것이다. 터크먼 씨는 “처음 발을 디딘 순간 거래소의 아드레날린을 느꼈다. 이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임을 알았다”고 말했다.
40년 동안 숱한 시장의 위기도 봐 왔다. 그는 “주가는 오르락내리락 하기 때문에 늘 행복한 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며 “내가 위기라고 붙이는 것은 딱 4 번뿐이다. 1987년 검은 월요일, 2000년 닷컴 버블, 2007년 금융위기, 그리고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라고 설명했다. 1987년 10월 19일, 다우지수가 하루에 22.9% 폭락했던 당시 트레이더를 지원하는 사원이었던 그는 “그날 많은 회사가 파산했다. 트레이더드의 스트레스와 고뇌 를 느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2007년 리먼 브라더스 파산 무렵에는 트레이더로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계좌에 돈이 마르고 고객도 잃었다. 주식거래 시스템이 점점 컴퓨터로 대체되며 ‘올드스쿨’이 적응하기 어려운 장이 펼쳐졌다. 하지만 활발히 거래를 하는 ‘척’ 하며 매일 NYSE로 출근했다. 그는 “어렵다고 이불 속에 있으면 절대 기회가 오지 않는다”며 “내가 잘하는 일이고, 좋아하는 일이니 언젠가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우연히 출근 길에 마침 브로커를 구하고 있던 월가 인사를 만나 의기투합해 새로운 거래 모델을 도입하는 사업을 구상하게 됐다. 기회가 온 것이다.
유대인인 터먼 씨는 “나치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부모님으로부터 ‘늘 살아남아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살아남아 우리의 이야기를 후대에 전하라고 하셨다”며 “이를 위해선 아무리 하기 싫고 힘들어도 늘 해야할 일과 장소로 가야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아내를 잃었다는 그는 “어머니날인 어제는 내 인생 최악의 날이었다. 나의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자녀들은 어머니가 없는 첫 어머니날이었다”며 “하지만 고통스럽다고 멈추면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 젊은이들이여, 포모에 투자말라”
그가 세계 각국 신문에 등장하는 ‘월가의 얼굴’이 된 것도 금융위기 무렵이었다. 2007년 증시폭락에 낙담한 얼굴이 뉴욕데일리 1면에 실리며 화제가 됐다. ‘표정부자’인 덕에 거의 모든 언론사가 그의 표정을 통해 롤러코스터 증시를 담았다. 처음 월가에 입문할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얼굴이 알려진 덕에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기쁨을 줄 수 있었어요. 사실 삶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40년 동안 월가도 많이 변했다. 1980년대 NYSE 플로어에서 일하던 트레이더는 약 1300여 명이었지만 현재는 300여 명으로 줄었다. 아무도 서로 고함치며 거래하지 않는다. 현장에서도 각자의 컴퓨터를 통해 주식을 거래한다. 그럼에도 그는 현장에서 사람을 통하는 중개의 중요성을 믿고 있다. ‘언제까지 NYSE 플로어에 있을 것인지’를 묻자 “아마도 내가 죽어야 NYSE를 떠날 것”이라며 웃었다.
터먼 씨는 새로운 기술을 공부하고, 적응하며 새로운 ‘직업’을 더하고 있다.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로, 월가 스타 애널리스트 댄 아이브스와 함께하는 팟캐스트도 진행자로, 트레이딩 아카데미 ‘선생님’으로 활동 중이다.
이날 인터뷰에서도 한국의 젊은 투자자들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그는 “팬데믹에 풀린 돈과 로빈후드와 같은 주식거래 테크놀로지의 등장은 4, 5000만 투자자에게 보낸 ‘증시 파티’ 초대장이었다”며 “문제는 파티의 룰을 모르고 포모(FOMO·fear of missing out)나 유행(hype)에 휘둘리는 이들이 많다. 꼭 규칙이 적힌 ‘플레이북’을 먼저 공부하라고 싶다”고 했다. 특히 감정에 휩싸여 포모에 투자하지 말라는 것을 재차 강조했다.
물건에 돈을 쓰느니 주식을 사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그는 “요즘은 무엇이든 사는데 열중한다. 하지만 좋아하는 물건을 만드는 회사의 주주가 될 생각을 해보라”며 “스타벅스 커피가 좋으면 커피를덜 마시고, 아이폰이 좋다면 신제품 대신 애플 주식을 사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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