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지 좁아진 기시다, 日총리 연임 가능할까
20%대 지지율에 잇따른 지선 패배… 자민당 출마자, 당 간판 숨기기 급급
‘전가의 보도’ 국회 해산 사실상 포기… “지금 총선 치르면 정권 바뀔 수도”
당 장악력 떨어져 국회서도 갈팡질팡… ‘포스트 기시다’ 없어 자민당도 고민
《기시다, 日총리 연임 가능할까
9월 임기가 완료되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연임에 빨간불이 켜졌다. 지지율이 20%대에 머물러 있는 데다, 자민당이 잇따라 선거에서 패하며 입지가 불안해졌다. 기시다 총리가 물러나면 공조를 다진 한미일 협력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금은 정치개혁 등에 전념해 결과를 내는 것 외에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4일 오전 일본 도쿄 총리관저 1층 로비. 출근하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에게 ‘6월에 중의원(하원) 해산’ 여부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출근길 문답(도어스테핑)에 나선 기시다 총리는 언뜻 뻔해 보이는, 정론적인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대답 뒤 일본 언론들은 ‘기시다 총리가 해산을 보류할 것’이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올 9월 말 임기가 끝나는 기시다 총리가 해산 카드를 끝내 꺼내지 못하게 됐다는 관측이다.
한국은 국회 해산 제도가 없어 잘 와닿지 않지만, 일본 정치권에선 이날 국회 해산 보류로 해석되는 기시다 총리의 발언에 대해 궁지에 몰린 현재의 처지를 드러냈다는 분석도 나왔다.
20%대에 머물러 있는 낮은 지지율에다 최근 주요 선거의 잇따른 패배로 기시다 총리의 연임은 갈수록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있다. 일본 총리의 불안한 입지는 자국 정치 문제를 넘어 동아시아 정세에 중요한 틀인 한일 공조와 한미일 협력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집권 자민당도 현재로선 기시다 총리를 이을 마땅한 인물이 없어 고민이 적지 않다.
● 선거 ‘연전연패’ 무너지는 자민당
2일 치러진 도쿄 도심 미나토구 구청장 선거는 일본 정치계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 야당 구의원 출신인 무소속 세이케 아이(清家愛) 후보가 집권 자민당 추천을 받은 5선 현직 다케이 마사아키(武井雅昭) 구청장을 꺾고 당선됐다.
일본은 지방자치단체마다 임기 시작과 종료가 제각각이라 크고 작은 지방선거가 수시로 열린다. 구청장 1명을 뽑는 초미니 선거였지만, 일본 정치권은 거듭되는 자민당 패배를 또 한번 확인하며 개표 결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번 선거는 ‘투표율이 낮으면 조직력이 강한 여당이 유리하다’는 정치 격언도 통하지 않았다. 이날 투표율은 30.6%로, 투표 참여가 저조한 일본에서도 비교적 낮은 수치였기 때문이다.
일본 정치권에는 모든 야당을 합쳐도 집권 자민당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1.5당 체제’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올해 들어 자민당은 주요 선거에서 연달아 패하며 이미 정국 주도권을 놓친 모양새다.
4월 28일 치러졌던 중의원 보궐선거 역시 자민당은 전패(全敗)했다. 심지어 보선이 치러진 3개 지역구 중 2곳에선 아예 후보 공천조차 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후보를 냈던 시마네1구에선 제1야당 입헌민주당에 졌다. 시마네현은 1996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래 한 번도 자민당이 의석을 내준 적 없던 ‘보수 텃밭’이었다. 패배의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지난달 26일 시즈오카현지사 선거도 자민당 후보가 야권 후보에게 밀려 고배를 마셨다. 애초 자민당은 정세가 불리하단 이유로 중앙당 공식 추천을 고민했다. 결국 ‘어려운 싸움에서 이기면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며 추천을 강행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고, 자민당은 더 큰 타격을 입었다. 차기 총리감으로 부상하던 시즈오카 지역구 국회의원인 가미카와 요코(上川陽子) 외상이 지원 유세에서 여성 차별적 발언을 한 것도 악재였다.
일본에서 자민당 공천을 받는다는 건 다른 당과 출발선이 다르다는 의미다. 건설업계와 농업계, 종교계 등 막대한 조직표를 등에 업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국회 보궐선거나 시즈오카현지사 선거 등에서는 여당 후보가 당 간판을 숨겼다. 해당 선거가 중앙 정치와 무관하다는 점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런데도 유권자의 마음을 붙잡긴 어려웠다. 오히려 “이번 선거에서 이기면 기세가 붙는다. 정치개혁 논의에 탄력이 붙을 것”(이즈미 겐타 입헌민주당 대표)이라는 야권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었다.
이러다 보니 7월 7일 일본 최대 지방선거인 도쿄도지사 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자민당 출신이었으나 현재 무소속인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72) 현 지사가 3선에 도전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고이케 지사는 “자민당으로부터 들은 얘기는 없다”며 거리를 두고 있다. 고이케 지사는 혐한 성향의 우익 정치인으로 이념적으로 자민당 강경파에 가깝다. 하지만 자민당 지지율이 바닥인 상황에선 손을 잡아봐야 득이 되지 않는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여기에 광고모델과 TV 앵커 출신으로 인지도가 높은 입헌민주당 렌호(蓮舫·57) 참의원(상원) 의원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일본에서 보기 드문 ‘여성 정치인 빅매치’라 렌호 의원이 승리하면 자민당으로선 다른 지방선거 패배보다 충격파가 훨씬 크다. 인구 1400만 명의 수도 수장 자리가 야당에 넘어간다는 건 기시다 정권에 결정적 타격을 입힐 수도 있다.
● 반등 못 하고 20%대 머무는 지지율
2021년 10월 취임한 기시다 총리는 올 9월이면 임기가 만료된다. 하지만 재임 내내 지지율 반등의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22년 7월 참의원 선거 3일 전에 터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망, 지난해 5월 심혈을 기울여 성공시킨 주요 7개국(G7) 히로시마 정상회의 때 정도만 지지율이 다소 회복됐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 하락은 취임 이듬해인 2022년부터 하나둘씩 터져온 악재가 겹겹이 쌓인 결과다. 아베 전 총리 사망 직후 치러진 참의원 선거는 자민당이 단독 과반(119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뒀지만, 정치적 평가가 엇갈리는 아베 전 총리의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전격 결정하며 다시 지지율이 빠졌다. 자민당-통일교 유착 의혹과 주요 장관들의 잇따른 구설 등으로 지난해 초 30%대까지 하락했다.
G7 히로시마 정상회의 이후 상승세로 돌아섰지만 ‘반짝 효과’에 그쳤다. 기시다 총리 장남의 총리공저(공관) 송년회 개최 파문, 일본판 주민등록증 ‘마이넘버 카드’를 둘러싼 개인정보 부실 관리, 불륜 및 공직선거법 위반 의혹으로 낙마한 차관급 인사, 인기 영합 정책이라는 역풍을 맞은 감세 정책 등 일련의 사안들이 줄줄이 악재로 작용했다.
지난해 말 터진 파벌 비자금 추문은 기시다 정권을 그로기 상태까지 몰고 간 결정타였다. 당 자체 조사 결과 2018∼2022년 전·현직 의원 85명이 정치자금 수지 보고서를 부실 기재하고 파벌 모금 후원회에서 모은 정치자금 일부를 의원이 비자금으로 챙긴 게 드러났다. 기시다 총리가 몸담았던 ‘기시다파(고치카이)’를 전격 해산하고 비자금에 가장 크게 연루된 ‘아베파’ 등도 이후 해산됐지만, 오히려 “근본적인 대책 없이 깜짝 쇼로 대응했다”는 비판과 함께 국민 여론은 더 나빠졌다. 이후 기시다 총리 지지율은 20%대에 머무는 양상이다.
● “기시다 9월 재선 가능성 제로”
“지금 당장 선거하면 야당으로 정권이 교체돼도 이상하지 않다.”
“기시다 총리를 간판으로는 선거를 치를 수 없다.”
최근 자민당에선 이런 푸념들이 노골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기시다 총리의 당 구심력이 떨어졌다”(요미우리신문)거나 “차라리 기시다 정권이 빨리 무너지는 게 좋다는 의견도 있다”(아사히신문) 등 익명의 자민당 관계자 발언이 연일 언론에 보도된다. 4일 기시다 총리가 국회 해산을 보류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을 두고는 “지금 해산하는 것은 자살 행위”(자민당 다선 의원)라는 거친 평가도 나왔다.
국회(중의원) 해산은 일본에서 총리의 전권 사항이다. 여당 지지율이 높을 때 잘 사용하면 권력 기반을 다질 수 있어 ‘전가의 보도’로 불린다. 하지만 현재 기시다 총리는 낮은 지지율과 잇따른 선거 패배로 해산은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다.
일본 정치 전문가인 시라토리 히로시(白鳥浩) 호세이대 교수(정치학)는 “해산을 못 하면 이달 시행하는 세금 감면, 개각 등으로 지지율을 올려야 하는데 그걸로 인기가 오를지 의문”이라며 “기시다 총리의 9월 총리 재선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가 된 느낌”이라고 전망했다.
기시다 총리의 당내 장악력은 갈수록 약해지는 모습이다. 자민당이 파벌 비자금 추문을 계기로 추진하는 있는 정치자금법 개정안이 대표적인 사례다. 자민당은 정치자금 모금 행사 기부액 공개 기준을 현행 20만 엔(약 176만 원) 초과에서 10만 엔 초과로 하려다가, 연립여당 공명당 주장을 받아들여 5만 엔 초과로 더 낮췄다. 심지어 자민당은 3일 국회에 개정안을 제출했다가 제2야당 일본유신회 요청으로 개정안을 철회하고 재수정을 추진 중이다.
기시다 총리가 지지율 반등의 마지막 기회로 여겨졌던 정치자금법 개정을 ‘갈팡질팡’ 행보로 처리하면서 여야 모두 반발이 크다. 기시다 정권을 뒷받침해 온 아소 다로(麻生太郎) 자민당 부총재와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자민당 간사장은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냐”며 기시다 총리의 결정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자민당이 주도하는 법안 자체에 반대하는 입헌민주당도 “오락가락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며 맹비난했다.
문제는 자민당으로선 기시다 총리의 뒤를 이을 ‘포스트 기시다’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지도 높은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郎) 전 환경상과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간사장, 고노 다로(河野太郎) 디지털상 등이 차기 자민당 총재(총리) 선거의 출마 예상자로 꼽히지만 모두 당내 기반이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민당 총재 선거는 당원 표도 반영되지만 사실상 국회의원 투표로 결정돼 당내 세력 합종연횡에 따라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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