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2004년부터 2015년까지 NBC TV 리얼리티 쇼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견습생)를 진행했다. 어프렌티스는 견습 사원을 뽑아 트럼프그룹에 채용될 때까지 치열하게 경쟁하는 일종의 취업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당시 트럼프는 회사 오너로 등장해 지원자들에게 연달아 “당신 해고야!(You’re fired!)”를 외치며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직설화법으로 자기 할 말을 다하는 결단력 있는 지도자로 비쳤다. 그는 거짓말쟁이와 불성실한 사람을 경멸하고, 자기 비하를 일삼거나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을 혐오했다. TV 쇼에서 트럼프가 부정 행위자를 서슴없이 해고하며 “이것이 곧 미국이 지금 같은 어려움에 처하게 된 이유”라고 말할 때 시청자들은 환호했다.
“총알이 1㎝만 옆으로 갔어도…”
이 쇼는 2004년 1월 첫 방송 당시 미국에서 시청률 1위를 기록했고, 이후에도 미국에서 리얼리티 프로그램 중 시청률 5위 안에 드는 성공을 거두며 14시즌이나 계속됐다.
TV 쇼 덕분에 트럼프 전 대통령은 ‘리얼리티 쇼의 귀재’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이를 자산 삼아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뛰어난 화술과 쇼맨십을 구사한 덕분에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를 예상외로 물리치고 대권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20년 대선에서 부통령을 역임한 조 바이든 현 미국 대통령에 밀려 재선 문턱에서 패배했다.
절치부심해온 트럼프 전 대통령이 리얼리티 쇼보다 더 사실적인 저격 사건에서 살아남으며 ‘기적’을 연출했다. 그는 7월 13일 오후 6시 15분쯤(현지 시간) 펜실베이니아주 버틀러에서 유세를 하던 중 130m 떨어진 건물 옥상에서 범인이 쏜 총에 오른쪽 귀 위가 관통되는 상처만 입고 목숨을 건졌다. 당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연단 스크린에 투사된 차트 가운데 하나를 보려고 머리를 돌리지 않았더라면 총알에 맞아 숨졌을 것이다. 스티브 스컬리스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는 “기적이 있었고 신의 손길이 거기에 있었다”며 “총알이 1㎝만 옆으로 갔어도 우리는 다른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 ‘뉴욕포스트(NYP)’와 인터뷰에서 “불법 이민자에 대한 차트를 읽으려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지 않았더라면 살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매우 초현실적인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마가’ 힘입은 트럼프
더욱 주목되는 점은 경호원들에 둘러싸인 채 연단에서 대피하던 트럼프 전 대통령이 피를 흘리면서도 주먹을 치켜든 채 “싸워라(Fight)”라고 외치는 모습의 사진이 찍혔다는 것이다. 사진을 보면 공교롭게도 트럼프 전 대통령 뒤로 푸른 하늘 아래 미국 국기인 성조기가 나부끼고 있다. 마치 19세기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구도와 놀랍도록 흡사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이유에 대해 “사람들에게 내가 괜찮다(OK)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리고 미국은 계속 굴러가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며 우리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리얼리티 쇼 귀재답게 트럼프 전 대통령은 저격 순간에도 사진기자와 카메라맨이 현장에서 암살 미수 사건을 촬영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이런 모습을 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암살 미수 사건과 한 장의 사진은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온갖 부정적 인식을 불식하면서 백악관으로 가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해 말 전미정치학회(APSA) 회원과 정치 분야 전문가 525명을 대상으로 역대 대통령 45명에 대한 업적 평가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최하위인 45위를 기록할 정도로 형편없는 대통령으로 꼽혔다. 반면 조 바이든 대통령은 14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보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연방·지방 법원에서 기소된 4건의 형사재판에 따른 사법 리스크에 직면해 있다. 그는 1·6 의회 난입 사태 선동, 백악관 기밀문서 유출, 성추문 입막음, 2020년 대선 때 조지아주 선거 결과 번복 시도 등 4개 사건에서 91개 혐의로 기소됐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 전현직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형사재판에 넘겨진 피고인이다. 심지어 미국 전현직 대통령 중 유일하게 ‘머그숏’(mug shot: 범인 식별용 얼굴 사진)까지 찍는 ‘불명예’를 겪기도 했다.
게다가 트럼프 전 대통령은 멕시코와 국경에 장벽을 세우는 등 반(反)이민·반난민 정책을 적극 추진했고, 백인 우월주의적 태도로 미국 사회를 분열시켰다. 기후변화를 불신해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하는가 하면,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고립주의적 노선을 추구해 동맹국들과 협력·연대를 깨뜨렸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롯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등 독재자들과 친분을 맺기도 했다.
고령 논란 겪는 바이든과 대비
그럼에도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하며 다시 대권에 도전하게 됐다. 그가 7월 15~18일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선출된 것은 무엇보다 ‘마가(MAGA)’로 통칭되는 극성 지지층 덕분이다. 마가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16년 대선에서 내걸었던 구호인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MAGA)’의 알파벳 앞 글자를 딴 것이다. 마가의 주축은 농업이나 공업 등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저소득·저학력 백인층이다. 마가는 러스트 벨트(rust belt: 미국 북동부 제조업 쇠퇴 지역)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적극 지지하며 그의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비록 재선에는 실패했지만 마가의 영향력은 오히려 확대됐다. 바이든 대통령이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마가를 싸잡아 민주주의의 적으로 규정하고 비판해왔지만, 마가의 활동은 더욱 활발하다. 특히 트럼프 암살 미수 사건은 마가를 더욱 결집하게 할 것이 분명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신의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로 J.D. 밴스 상원의원(오하이오주)을 지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초선인 밴스 상원의원은 불법 이민 차단, 기후변화 평가절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조기 종식 등에서 ‘트럼프 닮은꼴’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그는 1984년 오하이오주 미들타운에서 태어나 부모의 이혼, 가난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흙수저’ 출신이다. 이라크 파병 등 군 복무를 거쳐 미국 예일대 로스쿨을 나온 뒤 변호사, 벤처캐피털 기업인을 역임하고 연방 상원의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하다. 러스트 벨트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의 상실감을 파고든 그의 자서전 ‘힐빌리의 노래’가 론 하워드 감독의 동명 영화로 제작돼 공전의 히트를 치기도 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밴스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선택한 것은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한 국민의 동정 여론과 지지층 결속 등 선거 판세가 유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득표 확장성을 감안해 온건한 성향의 후보를 내세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화당 전당대회는 트럼프 대관식의 전야제라는 말까지 나왔다. 암살 미수 사건에서 보인 트럼프 전 대통령의 모습이 마가 등 지지층은 물론, 일반 국민에게도 어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피를 흘리면서도 주먹을 불끈 쥐며 지지자들에게 굴하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것이 미국 국민의 머리에 각인됐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고령과 인지 능력 부족으로 후보 사퇴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과 비교돼 미국 국민에게 강인한 지도자로서 면모를 과시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대통령 역사학 전문가인 더글러스 브링클리 미국 라이스대 교수는 “미국인의 정신에는 압박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와 용기를 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뭔가가 있으며, 트럼프 전 대통령이 주먹을 높이 든 장면은 새로운 상징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세론 유지될까
미국 언론들은 공화당 전당대회 이후 트럼프 대세론이 크게 확산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 분위기를 반영하듯 뉴욕 증시와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가 상승세를 보이는 등 랠리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각종 이벤트에 대한 예측을 내놓는 베팅 사이트 폴리마켓은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 확률이 10%p 상승한 70%가 됐다고 밝혔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큰손들도 앞다퉈 트럼프에 정치자금을 기부하는 등 지지하고 나섰다.
하지만 트럼프 대세론이 대선까지 계속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매슈 달렉 미국 조지워싱턴대 정치역사학 교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12년 대선 캠페인 도중 총에 맞았지만 패배했다”면서 “1950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도 그해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패배를 막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미국 국민의 표심은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 사회의 분열은 암살 미수 사건에서 보듯 갈수록 커지고 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일부 공화당 강경파가 암살 미수 사건의 책임을 바이든 대통령에게 돌리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정치적 분열과 갈등이 해소되긴 어렵다”고 분석했다. 미국 국민이 과연 어떤 후보를 선택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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