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이 이달 6일부터 이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본토 기습이 ‘현대판 차르(제정 러시아 황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지도력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고 15일 진단했다. 2000년 취임한 푸틴 대통령은 집권 내내 ‘위대한 러시아’를 외치며 ‘안보 수호자’ 이미지를 통해 장기 집권해 왔다. 허를 찔린 본토 기습으로 이런 이미지가 완전히 훼손됐다는 것이다.
지난해 6월 러시아 민간 용병회사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푸틴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고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나도누에서 수도 모스크바 코앞까지 약 1000km를 단 하루 만에 진격했다. 이번에는 남서부 쿠르스크주 수자 일대의 국경 또한 우크라이나군에 힘없이 뚫리자 “푸틴이 영토와 국민 수호에 실패했다”는 여론이 심심찮게 고조되고 있다. 당국이 8일부터 자국 내 유튜브 접속을 차단하는 등 강도 높은 정보 통제에 나선 것 또한 이에 따른 민심 이반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 프리고진 반란보다 민심 충격 커
17일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수자 일대에서 주도(州都) 쿠르스크로 대피한 피란민은 최소 13만 명이다. 슬리퍼에 잠옷을 입고 다급히 빈손으로 대피한 이들 피란민의 모습을 보며 적지 않은 러시아인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전쟁을 실감했다는 것이다. 본인은 가까스로 피란에 성공했지만 그러지 못한 부모님과 연락이 끊겼다는 러시아인 류보프 안티포바 씨는 가디언에 “우리 군대가 지켜줄 것이란 믿음이 무너졌다”고 한탄했다.
미국 CNN, AP통신 등 서방 언론은 폐허가 된 수자 풍경을 속속 전했다. 특히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이끈 블라디미르 레닌의 동상도 포탄을 맞아 대거 훼손됐다.
이번 사태에 따른 민심 충격이 프리고진의 모스크바 진격 때보다 심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푸틴 대통령은 당시 프리고진의 반란을 손쉽게 진압했다. 프리고진은 반란 두 달 후 비행기를 타고 가다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 이후 첫 외국 군대의 러시아 본토 공격이어서 국민들이 받아들이는 충격 강도가 훨씬 크다.
우크라이나군의 기습 당시 비(非)전투인력인 징집병들이 수자 일대를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파장을 낳고 있다. 징집병은 1년간 복무하는 18~30세 청년으로 주로 제설 작업 등에 투입된다. 비전투 요원에게 국경 방어를 맡긴 것 자체가 러시아군의 허술한 전쟁 대응 태세를 보여 준다는 비판이 나온다.
NYT에 따르면 이번 기습으로 우크라이나는 최소 300명의 징집병을 붙잡았다. 향후 러시아와의 휴전 협상 때 이들을 유리한 카드로 쓰겠다는 속내를 보이고 있다.
● 상대방 영토서 교전 장기화 가능성
다만 러시아군 또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북동부 하르키우 일대에서 점령지를 확대하고 있다. 러시아군은 18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북한제일 가능성이 큰 탄도미사일 또한 발사했다.
이에 맞서 우크라이나군 또한 수자 일대의 점령 장기화에 대비해 러시아 본토 수 km 안쪽에 야전병원, 정비기지, 연료창고 등을 구축했다고 영국 이코노미스트 등이 전했다. 이를 감안할 때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이 서로 상대방의 영토에서 상당 기간 교전 상태를 이어 갈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7일 연설에서 미국 등 서방을 향해 “장거리 무기 사용 제한을 풀어 달라”고 요구했다. 서방 주요국은 사거리 250㎞ 이상의 장거리 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했지만 이를 러시아 본토 공격 용도로 쓰는 것은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 제한을 풀어 줘야 전쟁 승기를 잡을 수 있다는 계산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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