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상반기 우크라이나 정부와 군 인사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키워드는 ‘반격(counteroffensive)’이었다. 국내 언론이 ‘대공세’라고 표현한 대규모 반격 작전이다. 2022년 하반기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공급받은 우크라이나는 반격 부대를 편성해 지난해 도네츠크·자포리자 지역에서 영토 탈환을 시도했다.
1년 만에 달라진 우크라이나군
발레리 잘루즈니 당시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이 직접 지휘봉을 잡고 지난해 6월 시작한 이 작전의 목표는 원대했다. 러시아군 방어선을 단숨에 돌파해 아조프해 연안까지 기동부대를 밀어넣은 뒤 헤르손·자포리자·도네츠크 서부에 있는 러시아군을 섬멸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5개월 동안 실시한 반격 작전에서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 병력과 장비를 상당수 격파했지만, 어느 공세 지점에서도 핵심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우크라이나는 작전이 실패한 사실을 계속 부인했으나 그해 11월 공세를 중단하며 사실상 실패를 인정했다.'
지난해 공세는 자포리자와 도네츠크에서 각각 1개 축선 돌파를 목표 삼아 3~4개 여단을 투입하는 게 뼈대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세 초기부터 실패가 예견됐다. 우크라이나는 서방 세계의 대규모 장비 지원이 시작된 2022년 하반기부터 대규모 공세를 거론했다. “대지가 진흙탕이 되는 라스푸티차가 끝난 직후 공세에 나선다”며 언제, 어디서 공세를 시작할지 정보를 너무 많이 노출한 것이다.
그사이 러시아는 ‘수로비킨 라인’으로 불리는 대규모 방어선을 구축했다. 주요 방어선에 참호와 벙커를 대거 건설하는 동시에 대전차 장애물과 지뢰도 대량 설치한 것이다. 방어선 후방에는 대규모 포병부대도 배치했다. 이런 방어선을 돌파하려면 항공 우세를 압도적으로 먼저 점한 뒤, 포병의 강력한 화력 지원을 받는 전차와 장갑차 수백 대를 축차 투입하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당시 우크라이나군에는 그럴 만한 병력과 장비, 유능한 지휘관이 없었다. 이에 우크라이나군의 공세는 대대급 이하 소규모 병력으로 러시아군 방어선을 찔러보는 수준으로 이뤄졌다. 미국과 유럽에서 전문 훈련을 받고 돌아온 병사들과 이들 손에 쥐어진 서방제 무기는 러시아군을 압도했다. 전투마다 러시아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견고하게 구축된 방어선을 토대로 병력·장비 물량 공세를 펼쳐 우크라이나군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가 실패한 작전이었다.
영토 수복 작전에서 참담하게 실패했던 우크라이나군이 이제는 달라졌다. 우크라이나군은 8월 6일(이하 현지 시간) 시작된 러시아 본토 진공 작전에서 지난해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놀라운 점은 우크라이나군의 쿠르스크 침공 작전 선봉이 1년 전 자포리자 전선에서 형편없는 실력을 보였던 제82공중강습여단이라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군 제82공중강습여단은 지난해 반격 작전을 위해 급조된 부대다. 미국제 M1A1 에이브람스 전차, M2A2 브래들리 보병전투장갑차로 무장한 최정예 제47기계화여단과 함께 선봉에 섰다. 제82공중강습여단은 영국제 챌린저 2 전차 14대와 미국제 스트라이커 차륜형 장갑차 90대, 독일제 마르더 1A3 보병전투장갑차 40대, 이탈리아가 공급한 M109L 자주포 18문 등으로 무장했다. 부대원 대부분이 미국과 독일에서 훈련받고 온 정예병이다. 지난해 여름 공세 실패 후 후방에서 병력 보충과 재편성을 거쳤다. 그리고 반년 만에 완전히 달라진 능력을 보이며 쿠르스크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3만~4만 명 대규모 병력 투입
우크라이나는 이번 쿠르스크 침공 작전에 지난해보다 훨씬 많은 병력과 장비를 투입했다. 현재까지 식별된 부대는 제82공중강습여단을 비롯해 제80·95공중강습여단, 제22·61·88·115·116기계화여단에서 각각 차출된 1~2개 대대, 제36해병여단, 제103·127·241영토방위여단, 제8특수작전연대, 제49포병여단, 제27로켓포병여단과 개별 중대급 정보·드론부대 등이다. “우크라이나군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는 러시아 측 주장과 달리, 현지 정보 소식통들은 3만~4만 명의 병력이 이번 작전에 동원된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선봉인 제82공중강습여단을 제외한 대부분 부대가 건제(建制)를 유지하지 않고 임시 배속 형태로 공격부대에 편성됐다는 점이다. 최근 공세에서 우크라이나군은 1개 대대 또는 중대 단위로 여러 부대에서 차출돼 따로따로 작전 지역으로 이동했다. 제82공중강습여단처럼 하르키우 방어전을 지원하는 예비대로 작전 중 후방에서 재편성되고 다시 투입된 부대는 예외적인 경우다. 차출된 부대의 공통점은 ‘해외파’, 즉 미국과 유럽에서 훈련받고 온 정예부대로 병력과 장비 손실이 적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군 병력은 러시아 쿠르스크와 접한 수미 지역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자신들이 국경 넘어 러시아 본토로 진공할 것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국경 인근에 집결한 각 부대에는 8월 3일에야 작전 계획이 하달됐다. 일부 언론은 우크라이나군이 작전 보안을 유지하려고 사복을 입은 채 도보로 이동했다고 보도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쿠르스크를 침공한 부대는 기계화·차량화보병부대라서 모두 장갑차를 타고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러시아가 쿠르스크 국경 너머에 집결한 대량의 장갑차량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다.
러시아 정보기관은 우크라이나군의 쿠르스크 침공 준비 동향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공격 3주 전부터 쿠르스크 여러 지역에 우크라이나군의 포탄이 산발적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전자전 태세도 강화돼 국경 너머 우크라이나군 동태를 살피러 간 러시아군 드론이 먹통이 됐다는 보고도 늘어나는 추세였다. 러시아 정보당국은 이런 상황을 종합해 우크라이나군의 쿠르스크 침공이 임박했다는 첩보 보고를 총참모부에 올렸다. 하지만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시아군 총참모장은 이를 우크라이나군의 기만 공작으로 판단하고 무시했다. 당시 러시아가 도네츠크 지역 포크롭스크 방면의 공세를 크게 강화해 우크라이나군 방어선을 점차 밀어내는 상황이기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를 칠 여력이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게라시모프의 오판에 한몫했다. 현재 러시아에선 게라시모프를 총참모장직에서 경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빈집’ 쿠르스크 허 찔린 러시아
쿠르스크는 사실상 빈집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는 모든 병력과 장비를 쥐어짜 포크롭스크·차시브야르·하르키우 방면 공세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쿠르스크 주둔 러시아군은 이른바 2선급 부대였다. 지난해 국경 수비 목적으로 동원 예비군을 모아 급조한 제346차량화소총연대와 국가근위대·연방보안국 산하 국경경비대 등이다.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 제98근위공수사단 예하 제217근위공수연대 일부 병력과 러시아 국가근위대 예하 체첸군 부대인 ‘아흐멧대대’가 배치됐지만 그야말로 한 줌에 불과한 규모였다.
쿠르스크에 배치된 러시아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징집병 위주라는 것이다. 현재 러시아군 병사의 신분은 크게 징집병·계약병·동원병·용병 등 4가지다. 징집병은 18~30세 병역의무 대상자가 징집돼 1년간 의무 복무하는 것이다. 계약병은 자원입대해 2~5년간 복무계약을 체결한 직업군인이다. 동원병은 징집·계약 복무 후 예비역으로 전환된 자원 중 동원령에 따라 소집된 인원이다. 용병은 정부 또는 국영기업이 설립한 민간군사회사(PMC)와 계약한 이들이다.
현재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SMO) 지역에 투입된 러시라군 병력의 절대다수는 계약병과 동원병이다. 러시아 현행법상 징집병을 SMO 지역에 투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지난해 도네츠크·루한스크·자포리자·헤르손 등 4개 지역을 자국 영토로 편입하면서 징집병을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생기긴 했다. 하지만 징집병의 전장 투입에 대한 러시아 여론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이에 따라 SMO 지역에 보내진 러시아군 징집병은 직접 전투보다는 후방 지원 임무를 주로 수행해왔다.
쿠르스크 지역 정규군 부대의 징집병은 ‘출신성분’이 좋은 경우가 많다. 정부 관료나 부자 부모를 둔 ‘금수저’라는 얘기다. 뇌물이나 청탁 덕에 전장과는 거리가 먼 러시아 본토에 배치된 것이다. 이 때문에 국내 근무 징집병은 대부분 양질의 군사훈련을 받지 못했다. 자신이 전쟁에 휘말릴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을 테다. 우크라이나가 쿠르스크를 침공했을 때 러시아군 병사 상당수가 저항 대신 투항을 선택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쿠르스크 주둔 러시아군의 특징을 파악해 맞춤형 공세 전술을 구사했다. 우선 다수의 차량과 장갑차로 도시나 마을을 3면에서 포위한 뒤 드론으로 투항 권고 전단을 뿌렸다. 투항하면 포로로 잡고 저항하면 포병과 드론으로 제압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초 러시아군 징집병은 대부분 도주를 택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체첸군 부대 병력을 풀어 탈영병을 사살하기 시작하자 징집병 상당수가 개별 탈영 대신 집단 투항을 택했다. 이들은 소대·중대 단위로 무장한 채 체첸군을 경계하며 우크라이나군 장악 지역까지 이동했다. 그 후 우크라이나군과 만나면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는 식이었다.
현재 러시아는 항공 전력을 쿠르스크에 집중해 우크라이나군을 저지하고 있다. 동시에 다른 지역에서 급히 병력을 차출해 투입할 준비도 하고 있다. 이른바 ‘쿠르스크 대(對)테러 작전’이다. 이 작전을 총괄하는 이는 국무원 서기 알렉세이 듀민 상장(上將·한국군의 중장급)이다. 듀민 상장은 우크라이나군 진출선에서 20㎞ 이상 떨어진 E38 고속도로 일대에 참호선 구축을 지시하고 증원 부대를 이 일대에 집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군이 E38 고속도로 일대 러시아군 방어선까지 추가 진격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하르키우 전선에 투입된 러시아군 제47근위전차사단과 제144근위차량화소총사단 등 정예 기계화부대가 쿠르스크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이미 전략적 목표 달성
우크라이나는 ‘쿠르스크 군사행정청’을 설립해 점령지 주민을 끌어안는 한편, 곳곳에 방어진지를 건설하며 ‘굳히기’ 준비를 하고 있다. 서울 면적의 2배가 넘는 지역을 손에 쥐고 차후 휴전 협상에서 유용한 카드로 쓰겠다는 계획인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러시아는 전력을 기울여 쿠르스크를 되찾으려 할 테고, 결국 영토를 수복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번 쿠르스크 침공으로 우크라이나는 이루고자 하는 전략적 목표를 대부분 달성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리더십에 크나큰 상처를 냈을 뿐 아니라, 주요 전선에서 우크라이나군을 압박하던 러시아군 주력 부대를 빼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과연 러시아는 쿠르스크 침공이라는 변수 탓에 꼬일 대로 꼬여버린 전황을 해결할 수 있을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