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판 ‘기사식당’ 부용의 전성기[조은아의 유로노믹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0월 11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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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도심의 서민 식당 ‘부용’의 외관. 점심시간이 지나도 긴 줄이 이어졌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지난달 말 프랑스 파리 도심에 있는 서민식당 ‘부용(Bouillon)’의 한 프랜차이즈 지점을 찾았다. 이 식당 앞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오후 3시까지도 긴 줄이 이어졌다. 주변 다른 식당들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좁은 골목을 따라 늘어선 줄을 기다리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니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어깨가 닿을 듯하게 다닥다닥 붙어 앉아 식사를 했다. 공간이 워낙 좁으니 손님들은 가방 등 소지품을 식탁 위에 설치된 난간에 여기저기 올려놨다. 웨이터는 손님에게 주문을 받을 때 식당 위에 깔린 종이 깔개에 메뉴를 받아 적는 털털함을 보였다. 이 모두 프랑스 고급 식당에서 보기 힘든 소탈하고 서민적 풍경이다.

프랑스도 한국처럼 경제난과 고물가에 요식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부용만은 ‘경제난 무풍지대’처럼 보였다. 현지에서는 서민식당 부용이 저렴한 가격으로 고물가 시대에 전성기를 맞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 코스 요리가 3만 원 이하

프랑스 파리의 ‘부용 샤르티에’ 내부. 손님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소지품을 식탁 위 난간에 올려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부용은 프랑스어로 ‘고기 국물’이란 뜻으로, 한국의 국밥집 같은 곳이다. 프랑스엔 고급 레스토랑인 ‘가스트로노미’, 이보다 합리적 가격대의 가정식 식당 ‘비스트로’가 있다. 부용은 비스트로보다도 더 저렴한 서민식당이다. 국내 유튜버들은 ‘프랑스의 기사식당’이라고 소개를 많이 한다.

19세기 말 프랑스에는 부용이 수백 곳 있었다. 서민적이면서도 저렴한 가격대의 부용은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와중에도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점차 외식산업이 발달하고 기업화되면서 부용의 고기국물 메뉴는 미국식 ‘그릴 레스토랑’에 밀렸다. 그나마 1896년에 문을 열어 128년 역사를 자랑하는 ‘부용 샤르티에’가 잘 알려진 정도였다. 그러다 2017년 피에르 무지에 형제가 파리에 ‘부용 피갈’을 개점하면서 부용이 다시금 언론에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고급 식당과 패스트푸드점에 가려졌던 부용이 최근 들어 전성기를 맞은 분위기다.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는 “19세기에 탄생한 전형적인 파리지앵 레스토랑(부용)이 놀라운 부활을 보이고 있다”며 “전통적이면서도 호화로운 장소에서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음식을 제공한다”고 보도했다.

부용의 부상은 최근 경제난과 고물가로 요식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 더욱 주목 받는다. 현지 언론 RMC에 따르면 2023년에는 프랑스의 식당 7200곳이 폐업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폐업 규모가 전년에 비해 44% 는 것이다.

부용에서 판매하는 음식들. 프랑스 가정식 전식, 본식, 후식을 1인당 20유로도 안 되는 가격에 맛볼 수 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부용은 저렴한 가격이 매력으로 꼽힌다. 보통 일반 식당에선 메인 요리 1인분만 시켜도 20유로(약 3만 원)를 훌쩍 넘기가 쉽다. 하지만 이곳에선 전식, 본식, 후식을 모두 시켜도 20유로를 넘질 않았다.

부용의 한 지점에서 식사 중이던 나딘느 프레옹 씨는 “여기서 갈려진 당근 요리를 전식으로 먹었는데 1유로(약 1500원) 정도였다”며 “파리에선 이 음식을 1유로에 살 수 있는 데가 없다”고 강조했다.

저렴한 가격은 ‘규모의 경제’ 덕에 가능하다. 워낙 손님이 많으니 많은 식재료를 저렴하게 대량 구매해 음식을 싸게 팔 수 있는 것이다. ‘가격이 어떻게 이렇게 저렴할 수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곳에서 오래 근무했다는 웨이터 마르 마르탱 씨는 “손님이 워낙 많기 때문”이라며 “매일 약 1500인 분의 식사가 항상 팔린다”고 설명했다.

● 부용의 기업화…쇼핑센터에 입점하기도

부용의 식탁에 깔린 종이 깔개에 적힌 웨이터의 주문 관련 메모.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부용의 대표 메뉴도 소고기 국물 음식인 ‘뵈프 부르기뇽’, 고소한 ‘오리 콩피’ 등 서민적이고 친근하다. 부용에서 만난 프랑스인들은 “할머니의 손맛이 그리워 부용에 맛보러 온다”고 했다.

간단하고 실용적인 음식 조리 덕에 요리가 빨리 나오는 점도 장점. 생투앙쉬르센 지역에 올해 여름 개점한 ‘부용 뒤 콕’의 티에리 마르탱 총괄 셰프는 프랑스 일간 르몽드에 “오전 7시부터 직원을 투입해 마요네즈 달걀 등 미리 조리된 음식을 식당이 영업하기 전에 준비해 둔다”며 “모든 건 조직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소개했다.

복고풍 인테리어도 옛 향수를 불러일으켜 차별점이 됐다. 부용 지점들에선 흔히 빛바랜 옛 그림과 손때 묻은 시계, 낡은 샹들리에를 볼 수 있다.

부용은 옛 유산을 잘 살리는 동시에 현대화에도 힘써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르몽드에 따르면 ‘부용 피갈’과 ‘부용 레퓌블리크’는 포장판매는 물론 파리 교외까지 닿는 배달 서비스를 제공한다.

서민식당 부용은 이제 좁은 골목이 아니라 각종 프랜차이즈가 들어선 파리 외곽의 대형 쇼핑센터에도 생기기 시작했다. 제과 명장의 이름을 딴 대형 제과 기업 ‘장프랑수아 푀이에트’는 부용을 프랜차이즈로 대형화했다. 빵집을 운영하던 그가 첫 레스토랑 사업을 시작하며 부용을 택한 것. 지난해 그가 문을 연 ‘쉐뤼세트’는 메인 코스와 디저트를 15.50유로(약 2만 원)에 판매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에서 불거지는 경제 이슈가 부쩍 늘었습니다. 경제 분야 취재 경험과 유럽 특파원으로 접하는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 유럽 경제를 풀어드리겠습니다.


#프랑스#부용#서민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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