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5월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인도 영화 최초로 심사위원대상(2위)을 수상한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에서 주인공 ‘프라바’를 연기한 인도 배우 카니 쿠스루티(39)는 영화에 쏟아지는 반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9일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으로 한국을 찾은 쿠스루티를 화상으로 만났다.
영화는 고향을 떠나 인도 북부 뭄바이의 한 병원에서 일하는 세 여성의 역경과 우정을 담았다. 국내에서는 내년 중 개봉한다.
프랑스 르몽드는 “꿈결같이 아름다운 영화”라며 “38세인 젊은 파얄 카파디아 감독이 영화 예술의 본질을 담아냈다”고 극찬했다. 영국 BBC도 “뭄바이에 바치는 마법 같은 시”라고 높게 평가했다.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인도 영화가 초청된 것은 30년 만. ‘당길’ ‘세얼간이’ 등 세계인을 즐겁게 한 인도 영화가 여럿 있지만 영화제에서 주목받는 일은 드물었다. 쿠스루티는 “인도에는 거빈더 싱(Gurvinder Singh) 감독과 아밋 두타(Amit Dutta) 감독 등 칸영화제 경쟁 부분에 진출할 재목이 많다. 우리의 수상이 인도 영화계에 빛을 비추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쿠스라티가 영화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과 인연을 맺은 것은 무려 8년 전이다. 파얄 카파디아 감독이 그가 나온 단편영화를 보고 먼저 연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쿠스루티에게 영감을 받아 다른 주인공 ‘아누’ 역을 만들었다고 했다.
불행히도 ‘영화 대국’ 인도에서 독립 영화가 설 자리가 매우 좁다. 영화는 무려 5개국 제작사(프랑스 2곳, 인도 2곳, 룩셈부르크·네덜란드·이탈리아 1곳)가 합심해 유럽 자금을 조달한 끝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영화를 보고 나면 쿠스루티가 사실은 뭄바이에 사는 간호사가 아닐지 궁금해진다. 그만큼 자연스럽지만 그는 15세에 처음 연극 무대에 오른 25년차 배우다.
청소년기에는 연기에 대한 열정이나 관심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천체물리학, 공학, 건축학 전공을 꿈꾸던 이과생이었다. 당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에 여성 연기자가 극히 적기도 했다. 연극에 도전한 것은 어머니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는 “15세에 첫번째 연극으로 재미를 느꼈고, 16세에 두번째 연극으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됐다”며 “연극은 자기 이해와 자기 발견의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또 배우가 세트도 만들고, 대본도 함께 짜는 연극 특유의 환경이 좋았다고 한다.
연기 자체를 좋아하기까지는 10년 넘게 걸렸다. 고등학교 졸업 후 케랄라주 트리수르 드라마스쿨, 그리고 움직임 위주의 ‘신체적 연기’와 창작 연극에 비중을 둔 프랑스 파리 자끄르꼭 연극학교에서 공부하며 연기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쿠스루티는 출연한 영화만 45편이 넘고, 드라마로도 인도 대중에 얼굴을 알렸다. 그는 “제안이 들어오면 다 했다”며 웃었다.
연기할 때는 전적으로 감독의 지시에 맞추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것.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현장에서는 제 신체를 묘사할 때 남성의 시선이 아닌 중립적인 시선으로 보려고 해요. 저는 사실적 연기보다는 ‘신체적 연기’를 추구해요. 연극이 제 연기의 뿌리인 영향도 있고, 자신도 놀라게 할 연기가 좋은 연기라고 생각합니다.”
쿠스루티의 고향 케랄라주는 ‘인도 시네필의 고향’으로 불린다. 춤과 노래 중심인 힌두어권 영화와 달리 케랄라의 말라얄람어 영화는 이야기 중심이다. 지적 쾌감 또한 선사해 최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보급으로 인도 전역이 ‘몰리우드’ 영화에 주목하고 있다.
말라얄람 영화를 궁금해하는 한국 독자들에게 쿠스루티는 리조 조세 펠리세리(Lijo jose Pellissery) 감독 작품을 추천했다. 상업 영화로는 이마야우(Ee.Ma.Yau.), 마헤신테 프라티카아람(Maheshinte Prathikaram), 쿰발랑이 기사단(Kumbalangi Nights), 울로주쿠(Ullozhukku)를 입문작으로 추천했다.
주인공 ‘프라바’ 역은 오디션으로 따낸 배역이다. “두번째 오디션을 마치고 며칠 뒤에 합류해달라고 연락이 왔을 때는 정말 행복해서 눈물이 날 정도였어요. 8년 내내 하고 싶었던 작품을 마침내 하게 되었으니까요. 케랄라에 있는 모든 배우가 이 영화의 오디션을 봤어요. 파얄(감독)은 그만큼 모든 배역을 신중하게 캐스팅했어요.”
아름답고 생생한 영화를 만든 비결은 리허설이다. “연극을 준비할 때만큼의 노력을 기울인 영화예요. 한 달 가까이 다 함께 모여서 연습했어요. 솔직히 인도에서는 리허설 없이 찍는 영화가 많단 말이에요. 아주 이례적이고 이상적이었죠. 저예산 영화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시도입니다. 100번 넘게 연습한 장면도 많았고, 제가 즉흥연기를 한 장면은 딱 하나예요.”
각본을 쓴 카파디아 감독 또한 세 언어를 모두 구사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쿠스루티는 “제작진 전원이 한마음 한뜻으로 헌신한 특별한 영화였다. 언어의 장벽이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각본을 번역할 때 중요한 기준은 ‘소리’였다. 영화 대사의 약 70%를 차지하는 말라얄람어는 카파디아 감독이 쓴 대사를 조연출 로빈 조이가 1차로 번역했다. 이후 단어를 조금씩 바꿔가며 문장을 여러번 읽어보다가 카파디아 감독이 가장 좋은 소리를 내는 문장을 골랐다.
말라얄람어 대사는 주로 쿠스루티가 맡은 간호사 ‘프라바’와 후배 ‘아누’(디비야 프라바)의 대화다. 배우들도, 이들이 연기한 등장인물도 모두 말라얄람어를 쓰는 남부 케랄라주 출신이다. 반면 병원에서 일하는 장면에서는 힌디어를 썼다. 뭄바이가 속한 마하라슈트라주의 공용어는 마라티어지만, 타향 출신 노동자가 대부분이라 공공장소에서는 힌디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칸영화제 경쟁 부문 선정 소식을 듣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렇구나. 잘됐다. 축하해.” 쿠스루티는 당일에 이렇게 동료들과 축하를 건넸다고 했다. 그는 “케랄라 사람들은 좀 차분한 편”이라며 “물론 소식을 듣자마자 정말 행복했지만 2, 3일 뒤에 흥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고 웃었다. 그는 “대가 없이 쏟은 노력을 인정받고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아주 적은 예산으로, 제작진 한명 한명이 최선을 다했다. 칸 진출은 모두의 성과”라고 말했다.
쿠스루티는 프랑스 개봉을 기념해 파리 투어를 마친 뒤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K-드라마’ 애청자라 매우 고대했던 일정이라고 했다. 부산에서 질의응답 세션을 통해 한국 관객과 소통한 그는 좋은 질문이 많이 나왔다며 “한국의 영화 팬층이 매우 두텁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번 영화제에서 쿠스루티는 아시아 신인 감독의 작품이 경쟁하는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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