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연극 리허설을 매번 울면서 마쳤어요. 극중 인물을 모두 이해하게 됐습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처음으로 연극으로 선보일 이탈리아의 연출가 겸 배우 다리아 데플로리안 씨(65)는 16일(현지 시간) 동아일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채식주의자를 연극화한 소감을 이같이 밝혔다. 그는 “작품의 한국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의미와 질문, 주제로 작업했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며 감동과 눈물 속에 연극 리허설을 마무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연극 채식주의자엔 주인공 영혜와 남편, 언니와 형부 등 4명이 등장한다. 이탈리아 극단 인덱스는 이 연극을 25일 이탈리아 볼로냐 초연을 시작으로 로마, 밀라노 등 주요 도시에서 무대에 올린다. 다음달에는 프랑스 파리 ‘오데옹’ 등에서도 공개한다.
수년 전부터 조용히 이 작품을 연극으로 고민했던 그에게 노벨문학상 수상 발표는 그야말로 깜짝 뉴스였다.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극단에 인터뷰 요청이 몰려들고 있다. 그는 오히려 “수상 발표 전에 연극 작업이 거의 마무리 돼 다행이다”라며 “많이 알려지지 않는 책을 마음껏 연극으로 창작할 자유를 얻어 좋았다”며 웃었다. 극단 인덱스는 연극을 한국에서도 선보일 것을 검토 중이다.
―한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
“우리는 두 배로 운이 좋았다. 우선 노벨문학상이 발표됐을 때 연극 작업이 거의 완료된 상태였다. 연극 작업이 한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우린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책을 연극화하는 데 자유를 얻었다. 이 점이 좋았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선 연극이 뉴스에 잘 안 나오고 나와 봤자 문화면에만 나온다. 그런데 모든 게 바뀌었다. 국내외 주요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몰려들고 있다. 11월 말에 예정된 밀라노 공연까지 티켓이 매진됐다. 우리의 관객층이 바뀌는 좋은 계기가 됐다.”
―채식주의자를 어떻게 접하게 됐나.
“2018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1912~2007)의 영화에 참여했다. 이 영화에선 이탈리아의 유명 여배우가 한 아내를 연기한다. 남편은 아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영화 작업이 발표됐을 때 내 친구가 한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읽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책을 읽었는데 읽은 지 며칠 만에 너무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안무가 겸 연기자인 안토니오 타글리리니와의 15년간의 공동 작업을 끝낼 때가 왔다. 이제 여성으로서 홀로 무엇을 할지 생각하다가 이제 한 작가 작품의 ‘영혜’에 대해 작업할 때라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몇 년 전 제작사를 찾았고 이 여성의 연극적인 버전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영혜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점을 발견한 것인지.
“극중에서 영혜의 언니 역을 맡았다. 언니 역할을 해냈을 때 정말 많이 울었다.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예술가이기에 형부 역할도 잘 이해했다. 형부가 영혜에게 끌리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모두 이해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반항적이었던 과거에 비해 더 규범적으로 변해가고 있음도 느꼈다. 나이가 들다 보니 단순히 나이가 드는 것뿐 아니라 과거보다 더 규범적인 삶을 인정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렇기에 영혜의 남편을 이해하게 된 순간엔 낯섦 앞에서 버티기 힘든 순간이 많았다. 내가 영혜를 정말 사랑한 이유는 영혜가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꿈을 꾸는 책임감, 결코 잊혀지지 않는 무언가를 알려줬기 때문이다. 영혜는 내게 삶의 의미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해줬다.”
―채식주의자의 연극 연출을 결정한 계기는.
“감동을 받을 때 그 감동을 나만을 위해 간직하는 건 매우 쓸모없는 일이다. 감동을 나누는 게 나의 일이다. 난 문학과 시를 좋아하지만 예전엔 연극 대본을 작업해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 해보니 이건 멋진 변신이었다. 한 작가는 뛰어난 언어를 갖고 있다. 그리고 작품이 잘 번역됐다. 한국어로 읽으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할 수가 없다. 원어로 읽고 싶어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
―소설이나 연극 대본에서 잊을 수 없는 문구는.
“채식주의자는 매우 신비로운 책이다. 다시 읽을 때마다 그녀의 말문이 다시 열리는 것 같다. 신비롭고 환상적이면서도 듣기 힘든 문장은 영혜의 이 대사다. ‘죽는 게 왜 그렇게 끔찍한가요?(Why is it so terrible to die?)’ 영혜는 언니가 떠나는 게 너무 슬프지만 언니가 ‘죽는 게 싫고 두렵다’고 말할 때 이렇게 말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질문이다.”
―영혜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 대사는 ‘삶의 길이보다 삶의 질이 더 중요하다’는 말만 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유럽 문화권에서 자라서 ‘윤회’라는 개념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데, 이 대사에서 ‘우리는 끝이 아닌 것을 끝이라고 부른다’는 인상도 받았다.”
―원작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원작에선 영혜에 대한 묘사가 많다. 남편과 형부, 언니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표정을 통해 그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연극에서는 영혜가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에 있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뿐만 아니라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로선 책임감이 더 커졌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표현할 자유가 더 커졌다는 얘기다. 이건 원작과는 큰 차이다.”
―연기하기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정말 어려운 작품이다. 전반적으로 공연을 마무리하는 방법이 어려웠다. 우리는 정말 울면서 리허설을 마쳤다. 소설은 보이진 않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고 무대에 있어야 했다. 그래서 (어떻게 보여야 할지) 선택을 해야 했다. 그래서 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고 매우 흥미롭기도 했다. 예를 들어 가족 점심 식사 장면은 극중 인물이 4명이라 보여주기가 참 어려웠다. 처음에는 (무대에 없는) 가족들 목소리를 녹음해 틀까 생각했지만 재미가 없었다. 대신 연극의 오랜 기술을 활용해 밖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듯 묘사했다. 그리스 비극에서처럼 폭력적이고 힘든 장면은 무대에 절대 올리지 않았다.”
―한 작가의 다른 작품은 어떻게 봤는지….
“한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이해하려면 ‘흰’ ‘희랍어 수업’ ‘작별하지 않는다’ 등을 읽는 게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의 작품엔 교향곡처럼 음표가 있고, 주제가 있다. 돌아오는 후렴구도 있다. 매번 인간성, 운명, 자매의 사랑, 전쟁과 폭력 등의 후렴구가 계속 돌아온다. 그러면서도 작품은 인류에 대한 위대한 사랑을 말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