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의 자존심 버버리의 위기[조은아의 유로노믹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1월 21일 14시 00분


영국 런던의 리젠트스트리트에 있는 버버리 매장. 런던=AP 뉴시스

최근 잠잠하던 유럽 증시에서 주가가 장중 22% 넘게 급등한 기업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명품 패션 브랜드 버버리였다. 버버리의 주가는 14일(현지 시간) 일일 최대 상승률을 보였다. 물론 그 이후 다시 하락하긴 했지만 이날만은 화려하게 상승해 화제였다. 버버리가 매출 감소를 극복하기 위한 쇄신 계획 ‘버버리 포워드’를 발표한 직후의 일이었다. 올해 7월 버버리에 합류한 조슈아 슐만 최고경영자(CEO)가 부임 뒤 야심 차게 처음 내놓은 대책이다.

사실 버버리는 이날 하루의 상승세와 달리 올해 들어 주가가 약 38% 하락하며 부진의 늪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다. 경기 침체에 따라 럭셔리 수요가 감소해 버버리뿐 아니라 프랑스 명품 브랜드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나 구찌와 발렌시아가를 보유한 케링 등 많은 럭셔리 브랜드가 고전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버버리는 올해 들어 벌써 두 번이나 이익 감소 충격을 맞으며 유독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 몽클레르 인수설까지 나와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버버리는 올해 4~9월 6개월간 4100만 파운드(약 726억 원)의 손실을 낳았다. 지난해 같은 기간엔 2억2300만 파운드(약 3947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기에 올해 실적이 더욱 충격적이다. 이 기간 매출은 22% 감소해 11억 파운드(약 1조9742억 원)가량에 머물렀다.

최근에는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이 버버리를 호시탐탐 노린다는 소문이 잦아들질 않는다. 한 때 LVMH의 버버리 인수설이 돌더니 최근 들어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몽클레르가 버버리를 흡수할 것이란 보도까지 나왔다. 해당 기업들은 인수 계획을 부인했지만 버버리로선 적지 않은 타격이었다. 시장에선 버버리의 부진이 계속되면 언제든 인수설이 재점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 1930년대 ‘당일배송’ 시작

버버리 목도리를 두른 모델. 버버리 인스타그램 캡처
버버리 목도리를 두른 모델. 버버리 인스타그램 캡처

버버리의 현주소는 화려했던 과거와 대비된다. 버버리는 1856년 영국 런던에 설립돼 168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의 장교들이 전투복으로 버버리를 입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는 아예 영국의 정식 군복이 됐다. 버버리의 대표적인 ‘트렌치 코트’의 ‘트렌치(Trench)’는 참호란 뜻이다. 군복 역사의 흔적이 남은 부분이다. 버버리의 코트는 이렇게 영국의 ‘국민 코트’가 됐다.

버버리 트렌치 코트의 특징은 안감으로 사용된 체크 패턴이다. 스코틀랜드 전통 문양인 ‘타탄 체크’에서 유래됐다. 1920년 레인코트 안감으로 처음 사용된 뒤 1960년대 이후 여행용 가방, 우산, 캐시미어 스카프 등 곳곳에 적용됐다. 이 체크 패턴은 너무 유명해져 다른 패션 브랜드들이 유사한 패턴을 내놓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버버리는 일찍이 혁신적인 서비스들도 내놨다. 대표적으로 자동차 인구가 많지 않던 1934년엔 버버리 전용 차량을 이용한 ‘당일 배송 서비스’를 시작하기도 했다. 요즘엔 ‘로켓 배송’이 일상화됐지만 당시로선 혁명적인 서비스였다. 이렇게 성장한 버버리는 곧 세계적 명품으로 자리 잡았다. 1965년 영국에서 수출된 코트 5개 중 1개가 버버리 제품이었다.

● “뿌리에서 멀어졌다”

승승장구하던 버버리가 최근 초라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매출의 30%가량을 중국 시장에 의존하는 사업 구조가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버버리는 중국 경제 성장률이 둔화되며 수요가 급감해 직격탄을 맞았다.

런던에서 부과되는 관광세도 버버리의 발목을 잡는다는 지적이 있다.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밀라노 등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런던에선 관광세가 부과된다. 면세 쇼핑이 안 되다 보니 관광객들이 런던으로 쇼핑하러 오길 꺼린다는 것. 버버리에 따르면 중국인 관광객이 최근 런던 매장에서 지출한 금액은 팬데믹 이전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반면 파리 매장에선 팬데믹 이전의 3배 이상으로 늘었다.

버버리 내부적으론 ‘뿌리를 너무 간과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버버리의 정체성인 아우터와 스카프의 강점을 잘 살리지 못했다는 얘기다. 슐먼 신임 CEO는 최근 쇄신책을 발표하며 “버버리가 시대를 초월한 핵심 컬렉션의 뿌리에서 너무 멀어진 뒤 급급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파비오 베케리 전 구찌 이사도 텔레그래프에 “버버리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며 “브랜드 DNA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액세서리 중심으로 고급화하는 전략을 썼는데 이는 잘못된 사명”이라고 말했다.

슐먼 CEO가 쇄신 방안을 소개하며 제시한 해법도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취지다. 그래서 나온 대책 중 하나가 ‘언제나 버버리 날씨(It‘s Always Burberry Weather)’란 캠페인이다. 비가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영국 날씨에 적응하며 다듬어진 트렌치 코트, 파카, 퀼트 등 아우터와 스카프의 강점에 집중하겠다는 취지다. 슐먼 CEO는 이런 방침을 소개하며 “우리의 강력한 기반을 바탕으로 버버리의 최고의 날이 앞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에서 불거지는 경제 이슈가 부쩍 늘었습니다. 경제 분야 취재 경험과 유럽 특파원으로 접하는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 유럽 경제를 풀어드리겠습니다.

#버버리#유럽 증시#명품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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