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하원이 4일 미셸 바르니에 총리가 이끄는 행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올 9월 5일 취임한 바르니에 총리가 속한 현 내각은 석 달여 만에 총사퇴했고 1958년 설립된 제5공화국 역사상 최단명한 정부로 남게 됐다. 프랑스 정부가 하원의 불신임안 가결로 붕괴한 건 1962년 조르주 퐁피두 당시 총리 이후 62년 만이다.
이번 사태로 당장 내년 예산안 처리가 불투명해졌다. 연말까지 예산안이 처리되지 않으면 5공화국 최초로 연금, 건강보험금 지급 등 공공 행정이 마비되는 ‘셧다운’ 사태를 배제할 수 없다. 야권 일각에서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퇴진까지 요구하고 있다.
프랑스의 정치적 혼란은 유럽을 포함한 국제 정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집권 사회민주당 주도의 연정이 무너진 독일 또한 16일 올라프 숄츠 총리에 대한 신임 투표를 앞두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유럽에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압박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재집권 등으로 유럽연합(EU)의 양대 강국이 모두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 전유럽이 영향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 지출 감축 예산안에 ‘90일 단명’
이날 하원에서는 좌파 연합 신민중전선(NFP)이 발의한 바르니에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이 전체 577석 중 찬성 331표로 통과됐다. NFP와 함께 불신임안을 발의한 극우 국민연합(RN),그 동조 세력 등이 모두 찬성표를 던진 결과다. 이에 따라 바르니에 총리는 취임 90일 만에 하원의 불신임을 받았고 5일 사표를 제출하기로 했다. 5공화국 사상 최단명 총리다.
중도성향 르네상스당 소속인 마크롱 대통령은 올 9월 정통우파 성향인 공화당 소속 바르니에 총리와 ‘동거 정부’를 구성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속한 범여권은 올 6월 총선에서 168석(2위)을 얻는 데 그쳐 과반을 확보하지 못했다. 당시 1위는 NFP, 3위가 RN과 연대 극우 세력이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통상 제1당 출신 인사를 총리로 임명하는 관례를 깨고 “좌파보다는 범여권과 결이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은 바르니에 총리와 손잡았다. NFP 등 좌파는 “대통령이 총선에서 드러난 민의를 배신했다”며 바르니에 정부 출범 때부터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
집권한 바르니에 총리는 지난해 1540억 유로(약 229조 원)에 이른 재정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공공지출 감축을 골자로 한 2025년 예산안을 발표했다. 내년에만 400억 유로(약 60조 원)의 정부 지출을 줄이고, 200억 유로(약 30조 원)의 증세도 단행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불어난 나랏빚이 저성장이 고착화된 경제를 위협하고 있는 탓이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프랑스의 올해 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최소 6.1%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EU가 규정한 한도(3%)의 두 배가 넘는다.
NFP와 RN 등은 복지혜택 축소 등을 우려해 강하게 반발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예산안 통과가 어렵다고 판단한 바르니에 총리는 2일 예산안의 핵심인 사회보장재정 법안을 정부가 하원 표결 없이 법안을 처리할 수 있는 ‘헌법 제49조 3항’을 발동해 통과시켜 버렸다. 그러자 좌파와 극우 진영이 극렬히 반대하며 불신임안을 발의했다. 이 안이 통과되면서 결국 총리가 물러나게 됐다.
● “정치적 혼란, 금융시장 흔들 위험”
중대 위기를 맞은 마크롱 대통령은 5일 대국민 연설에 나서기로 했다. 그는 극좌 정당을 중심으로 사퇴 요구가 제기되자 전날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도중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에너지를 다 하겠다”며 사퇴설을 일축했다. 로이터통신은 마크롱 대통령이 7일로 예정된 노트르담 대성당 재개관 기념식에 앞서 새 총리를 임명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전했다.
경제 불안도 커지고 있다. NYT는 예산안이 통과될 기미가 보이지 않은 채 정치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며 “금융시장을 흔들어 놓을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역시 정치 불안정이 장기화하면 채권 등 프랑스 자산에 대한 투자 위험이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