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 괴한의 총격에 숨진 미 최대 건강보험사 최고경영자(CEO)의 죽음이 보험금 지급을 회피하는 보험사에 대한 증오심에서 촉발됐을 수 있다는 정황이 나왔다. 현장에서 수거된 탄피에 ‘부인(deny)’ ‘방어(defend)’ ‘증언(depose)’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단어들은 미국에서 변호사와 보험업계 비평가들이 보험금 지급을 피할 때 흔히 쓰는 전략을 상징하는 문구다.
5일(현지시간) AP통신은 익명의 경찰 소식통을 인용해 “전날 맨하튼 호텔 앞에서 발생한 브라이언 톰슨 유나이티드헬스케어(CEO) 총기 살해 사건 현장에서 탄약 겉면에 이 같은 단어를 유성매직으로 휘갈겨 쓴 탄피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부인-방어-증언’은 보험업계에서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을 지연시키고, 청구를 거부한 다음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는 전략 패턴을 의미한다. 2010년에 출판된 책 ‘지연, 거부, 방어: 보험사가 청구금을 지불하지 않는 이유와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의 제목이기도 하다. AP는 “유나이티드헬스케어와 같은 보험사들은 환자들의 청구를 거부하거나 치료 접근성을 복잡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의사와 환자로부터 자주 비난을 받아왔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5000만 명 이상의 보험을 보장하는 이 회사는 의료비 청구 거부와 관련해 환자, 의사, 의원들로부터 다양한 불만과 조사를 받아왔다”며 “민간 보험사가 거부 수치를 공개할 의무가 없어 그 빈도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번 사건은 환자들과 사람들에게 엄청난 기쁨을 줬다”고 꼬집었다.
NYT는 한 틱톡 이용자의 영상을 인용해 “응급실 간호사로서 죽어가는 환자가 보험에서 거부당하는 걸 보면 아프다. 그래서 그(톰슨 CEO)에게 동정심을 느낄 수가 없다”고 전했다. 이어 “이 같은 어두운 반응은 미국의 의료 상태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와 좌절을 나타낸다”고 분석했다. 보험 지급을 받지 못해 절망하는 환자들과 달리 톰슨 CEO는 지난해 기본급과 주식 등을 합쳐 1020만 달러(약 142억 원)의 보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날 뉴욕 경찰은 총격범이 숙박한 것으로 알려진 맨해튼 어퍼 웨스트 사이드 지역의 호스텔에서 촬영된 CCTV영상을 공개했다. 해당 영상에서 범인은 마스크를 벗고 있어 어느 정도 얼굴 식별이 가능했다. 뉴욕 경찰은 1만 달러(약 1400만원)의 현상금을 걸고 범인 찾기에 나섰지만 5일 현재 범인은 아직 잡지 못했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상태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번 사건의 범인 추적이 난항을 겪으면서 이른바 ‘온라인 명탐전(네티즌 수사대)’들에게 흥미로운 사건이 되고 있다고 조명하기도 했다. 경찰보다 빨리 사건과 범인 정보를 파악하려는 탐정 지망생들의 관심이 몰리면서 이들이 거리의 CCTV 영상과 디지털 데이터를 분석하고 범인이 매고 있던 배낭 브랜드를 추적하는 등 열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보험업계에 반감을 갖고 있는 일부 네티즌들은 범인을 영웅시하며 ‘그를 잡으려 하지 말라’고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기업들은 이런 일이 자사의 CEO들에게 일어날까봐 긴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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