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현지 시간) 오전 미국 뉴욕 맨하튼의 남부연방법원 1305호. 성인 키의 5배쯤 되는 높은 천장에 고풍스런 마호가니 목재로 장식된 엄숙한 법정 안에서 3명의 검사와 3명의 변호사, 그리고 10여 명의 기자들이 두 명의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이 기다린 한 명은 가상화폐 테라·루나 폭락 사태의 주인공으로 교도소에 구금돼 있다 이날 출석할 예정이었던 권도형 전 테라폼랩스 대표(34). 또 한 명은 권 씨 재판을 담당할 뉴욕 남부연방지법 폴 A. 엥겔마이어 판사였다. 이날 이 곳에서는 오전 10시 30분부터 권 씨 사건에 대한 증거와 법적 논점 등 절차적 문제를 다루기 위한 사전심리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예정됐던 시각에서 5분쯤 지난 10시 35분, 일반인들이 출입하는 법정 오른쪽 문이 열리고 양팔을 붙잡은 두 명의 흑인 법정 경관과 함께 개나리색 반팔 점프수트 죄수복 차림의 권 씨가 나타났다. 엄숙한 법정의 색감이나 영하 5도의 이날 날씨와 전혀 맞지 않는, 하지만 만에 하나 도주라도 한다면 이 세상 누구라도 알아볼 법한 그런 색감의 죄수복이었다. 삭발에 가까운 짧은 머리의 권 씨는 테라폼랩스 대표 시절의 얼굴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마른 모습이었다. 권 씨의 허리에는 육중한 쇠사슬이 한 바퀴 감겨있었고, 사슬은 다시 주황색 수갑과 연결돼 권 씨의 양손을 결박하고 있었다.
권 씨의 등장에 수트 차림의 변호인단이 일어서 권 씨를 맞았다. 권 씨는 법정 경관들이 수갑을 열쇠로 풀어준 뒤에야 피고인석에 앉을 수 있었다. 베이지색 바지와 검은 점퍼 차림의 경관들은 수갑을 풀어준 뒤 곧바로 권 씨의 뒷좌석에 앉아 1m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그를 감시했다.
잠시 뒤, 판사실과 연결된 법정 정면의 문이 열리고 엥겔마이어 판사가 법정에 들어섰다. 권 씨를 포함한 모두가 기립해 판사에게 예의를 표했다. 동그란 검정 뿔테를 쓰고 검은 법복을 입은 엥겔 마이어 판사는 모두에게 새해 인사를 건넨 뒤 본격 재판을 시작하기에 앞서 명확히 하고 싶은 10여 개 사항에 대한 질의를 이어 나갔다.
이날 미국 정부를 대리하는 검찰 측은 지난 2일 제출한 79페이지 분량의 공소장 내용을 요약해 판사에게 설명했다. 검찰 측은 “이 사건은 400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초래한 대규모 사기에 관한 것”이라면서 “권 씨는 테라·루나가 알고리즘에 의해 돌아가는 안정적인 화폐라고 홍보했지만 이는 거짓이며 조작을 해야했다”고 밝혔다. 또 “세계적으로 100만 명이 넘는 피해자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권 씨 변호인 측은 “검찰은 마치 이 사건이 거대한 사기극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테라·루나에는 분명 알고리즘이 있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엥겔마이어 판사는 “미국 외에 다른 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기소 등이 있는지 궁금하다”며 검찰 측에 확인을 요청했다.
권 씨는 발언권은 없었지만 판사와 검사, 그리고 변호사 간 질의와 논쟁이 이어지는 동안 변호인이 준비해 온 서류를 꼼꼼히 읽거나 정면을 응시하며 판사와 검사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었다. 변호사에게 여러 차례 귓속말로 의견을 개진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권 씨는 대원외고-스탠포드대 출신이라는 화려한 스펙에 가상화폐 테라·루나를 통해 수십 조원의 시장을 만들어 내며 한 때 ‘한국판 일론 머스크’라고도 불렸던 인물이다. 하지만 ‘테라 프로토콜’이라는 컴퓨터 알고리즘을 통해 화폐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고 했던 말과는 달리, 테라·루나 가치가 한 순간에 폭락하며 사기 범죄자로 전락했다.
그는 폭락 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2022년 4월 싱가포르로 출국한 뒤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등을 거쳐 동유럽 발칸반도의 몬테네그로로 도피했지만 2023년 3월 위조 여권 소지 혐의로 현지 공항에서 체포됐다. 이후 한국과 미국이 범죄자 송환 경쟁을 벌인 끝에 지난해 12월 31일 미국행이 최종 확정됐고, 2일 있었던 약식 기소인부심리(기소된 죄목을 설명하고 유무죄 인정 여부를 묻는 절차)를 거쳤다. 사실상 이날이 미국에서의 제대로 된 법정 심리가 열리는 첫 날이었던 셈이다.
사전심리 막바지에 63세의 엥겔마이어 판사는 “내 판사 생활에서 재판 시작일을 1년 뒤로 잡는 건 처음”이라며 권 씨에 대한 재판 시작 날짜를 내년 1월 26일로 잡았다. 재판은 4주에서 6주가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재판 시작 날짜가 내년으로 미뤄진 이유는 검찰 측이 “살펴볼 자료가 워낙 방대하고 자료 중 상당수를 한국어에서 영어로 번역해야 한다”며 충분한 시간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앞서 검찰은 전날 법원에 권 씨의 업무 및 개인 이메일 계정, X(옛 트위터) 계정 및 4대의 휴대전화에 대해 수색 영장을 청구했다. 이날 제러드 레노 수석 검사는 “휴대전화 잠금 해제 등에 시간이 지체되고 있다”며 “관련 데이터가 약 6테라바이트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이에 엥겔마이어 판사는 “우리가 여기로 유홀(U-Haul·이사용 트럭업체)을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고 농담조로 말하기도 했다.
엥겔마이어 판사는 “사건의 엄중함과 큰 변호인단의 규모 등을 고려해 이 사건을 길게 가져가고 싶진 않다”며 “교도소 구금 상태에 있는 권 씨가 혹시라도 더 빠른 재판 진행을 원한다면 1주일 내에 변경을 요청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변호인단은 크게 재판 일정을 앞당기려는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다. 일각에서는 가상화폐 업계에 우호적일 가능성이 큰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사법 환경 변화를 기대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이날 심리가 끝난 뒤 권 씨는 다시 두 명의 법원 경관에 의해 허리와 손이 쇠사슬과 수갑으로 묶였다. 권 씨는 법정을 빠져나가다 방청석에 있던 미국 기자를 보고 “잘 지냈냐, 좋아보인다”며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해당 기자는 수년 전 뉴욕에서 테라폼랩스 대표로 승승장구하던 권 대표를 만나 인터뷰한 사이라고 했다. 그는 “그 때만 해도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권 씨는 미국 검찰에 각 2건의 상품 사기(최대 징역 10년), 증권 사기(20년), 정보통신 사기(20년) 혐의를 비롯해 사기 및 시세조종 공모(각 5년), 자금 세탁 공모(20년) 등 총 9개 혐의를 받고 있다. 미 법무부는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으면 최대 130년의 징역형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정식 재판 준비를 위한 다음 사전 심리는 3월 6일 오전 11시 맨해튼 남부연방법원에서 다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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