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및 일왕 사죄요구 발언 이후 고조된 한일 외교 갈등의 파장이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양국 정부와 기업 간 협력 중단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일본의 집권 민주당은 한국에 항의하는 국회(중의원과 참의원) 결의안 채택을 검토하기로 했다고 일본 언론이 16일 보도했다.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으로 향하는 양국 관광객이 일정을 취소하거나 시민 간의 물리적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다. 도쿄(東京)의 한류 1번지인 신오쿠보(新大久保) 거리도 활력이 넘쳐 튼튼해진 양국 민간 교류의 현주소를 잘 보여줬다. 다만 향후 사태 전개에 따라 한류의 인기가 냉각될 수 있다는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 민간 및 정부 경제 협력 차질
미쓰이스미토모카드는 22일 서울에서 개최하려던 신상품 발표 기자회견을 연기했다. 일본인 여행자를 대상으로 하는 선불카드도 다음 달 발행할 예정이었지만 시기를 늦췄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김진영 도쿄지사장은 “일본의 대형 슈퍼 체인과 전국 매장에서 10월에 한국 식품전을 열기 위해 협의해왔다. 일본 측은 추가 악재가 터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조심스러워했다”고 전했다.
지방자치단체들 간에도 마찰음이 나오고 있다. 일본 나가사키(長崎) 현은 19∼21일 서울을 방문해 한국인 관광객 유치를 협의할 예정이었지만 최근 외교관계 악화를 고려해 방한을 연기했다고 일본 언론이 전했다. 충남 당진시와 아키타(秋田) 현 다이센(大仙) 시의 우호교류도시 협정 체결도 무기한 연기됐다.
정부 차원의 경제 협력에도 브레이크가 걸렸다. 후지무라 오사무(藤村修) 일본 관방장관은 10월 만료되는 한일 통화스와프 중단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달 말 예정됐던 양국 재무장관 회담도 무기 연기됐다. 한국 정부는 통화스와프에 대해 “아직 일본의 공식 통보는 없었다”면서 상황 전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양국 간 경제협력 무드가 깨지면서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의 연내 개시는 물 건너갔다는 분석도 나온다.
다만 한국의 대일(對日) 무역의존도가 줄어들고 있어 당장 경제지표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대일 수출비중은 올 상반기 7.0%로 2003년의 8.9%에 비해 줄었다. 대일 무역역조의 주된 원인이었던 소재·부품 산업의 수입의존도도 2003년 상반기 28.0%에서 올 상반기 23.0%로 낮아졌다.
○ 신오쿠보 거리 활력 속 불안감 늘어
16일 신오쿠보 거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삼겹살 체인점 앞에는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기다리는 줄이 10m나 이어졌다. ‘소녀시대’의 노래 등 케이팝이 흘러나오는 화장품 가게도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1개에 300엔(약 4300원)인 한국 호떡을 사먹기 위해서도 줄을 서야 했다.
대학생인 후지와라 아이코(藤原愛子·21·여) 씨는 “독도나 천황(일왕)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한국 스타와 제품을 좋아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양국 외교 갈등이 한류를 좋아하는 일반 젊은이들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한인들은 극우 단체들의 갑작스러운 시위를 걱정하고 있다. 실제 이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10일 극우단체 소속으로 보이는 청년 2명이 교대로 신오쿠보역에서 욱일승천기를 흔들며 “한국인은 한국으로 꺼지라”라며 시위했다. 일본에 정착한 지 18년째인 재일한국인음식업협회 이의형 회장은 “신오쿠보에서 그런 풍경은 본 적이 없다”며 “한인회를 통해 한국 식당에서 올림픽 축구 한일전 영상을 방영하지 말라고 긴급 공지했다”고 말했다. 백영선 재일본한국인연합회 회장은 “사소한 문제가 발단이 돼 한류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어 긴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오쿠보에서 13일부터 23일까지 열리는 한류스타 사진전을 담당하는 관계자는 “일본 언론에서 전시회를 많이 취재해 갔지만 한일 관계가 나빠지면서 홍보에 타격을 입었다”며 “이 대통령의 일왕 사죄요구 발언에 일본인들이 받은 충격이 생각보다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주말 재일 한국인 가수들이 출연하는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는 한 사장은 “미리 경찰서에 신고했지만 극우 세력들의 타깃이 될 수 있어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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