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지방의 A지검에서 근무하다 올해 초 퇴임한 B 전 검사는 마지막 근무지 대신 한 광역자치단체의 C지검 앞에서 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 변호사법상 수임을 제한하는 일명 ‘전관예우 금지법’ 때문에 직전에 근무했던 A지검 사건은 직접 수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규정상 퇴임 전 1년간 근무했던 곳의 사건만 수임이 제한된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그렇다면 B 전 검사가 C지검 앞에 사무실을 차린 이유는 뭘까. 동아일보 취재팀이 20일 고객을 가장해 B 전 검사의 변호사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상담을 요청했다. 사무장은 “C지검에 있는 부장검사와 주임검사가 전부 선후배라 아무래도 유대 관계가 있고, 사건 처리 과정에서도 편할 수밖에 없다”며 ‘전관예우 효과’를 세세하게 홍보했다.
○ 전관예우 여전… 수임제한 피하는 ‘꼼수’만 늘어
취재팀이 전관예우 금지법이 시행된 2011년 5월 17일 이후 퇴임한 판검사 중 변호사로 개업한 것으로 확인된 287명의 개업지를 전수조사한 결과 적지 않은 변호사가 수임제한 기간을 교묘히 피해 ‘전관(前官) 효과’를 누리고 있었다. 대법원, 대검찰청부터 가정법원, 행정법원, 지방법원까지 등 각급 법원 검찰청이 모여 있어 ‘개업지’가 곧 수임사건과 연결되지는 않는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에서 개업한 전관들은 분석에서 제외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B 전 검사처럼 퇴임하기 1년 전에 몸담았던 법원 검찰청 앞에 법률사무실을 여는 이른바 ‘시간차 개업’이다. 통상 부장판사나 부장검사는 1, 2년, 판사와 평검사는 2, 3년마다 근무지를 옮기기 때문에 퇴임 1년 전 근무지로 돌아가 개업해도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수임제한 기간을 가까스로 넘긴 이전 근무지 인근에 개업한 퇴임 판검사는 19명이었다.
퇴임 직후에는 다른 곳에서 근무하다가 1년이 지나 수임제한이 풀리자마자 최종 근무지 인근으로 사무실을 옮긴 전관도 12명이나 됐다. D 전 판사는 2012년 재경 지법에서 퇴임하자 이전 근무지였던 수도권의 지법에서 개업했다. 그 후 1년이 지나자 다시 재경 지법 앞으로 복귀했다. 재개업 시점도 수임제한이 풀린 날부터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김영철 건국대 로스쿨 교수는 “법 시행 이후 ‘퇴임 1년차’ 전관들이 사건을 대놓고 수임할 수 없게 되자 ‘퇴임 2년차’들에게 ‘전관 파워’가 넘어갔을 뿐 전관예우 관행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개업지 제한 기간을 최소 2, 3년으로 늘려야만 전관예우를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일부 전관들은 수임제한 기간이 끝나자마자 적극적으로 ‘전관 파워’를 홍보했다. 지난해 초 퇴임한 E 전 판사는 얼마 전 한 법률전문지에 “소위 전관예우 금지법에 따라 최종 근무지 사건 수임이 제한됐지만 이제 모든 사건을 수임할 수 있게 됐으니 더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는 광고를 실었다. 법조인 커뮤니티에서도 ‘제한 해제’ 등의 키워드로 검색하니 수십 건의 관련 글이 올라왔다. 전문가들은 “공정한 수임 질서를 해치는 광고를 제한하는 변호사법에 저촉될 만한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 ‘전화변론’ 더 쉬운 로펌으로 옮겨
전관예우 금지법을 시행한 뒤 겉으로 드러난 전관예우 개업은 줄었다. 법 시행 전인 2010년 5월 17일∼2011년 5월 16일 퇴임한 판검사 132명 중 근무지 인근에서 개업한 경우는 70명(53%)이었다. 함께 근무했던 동료 및 선후배가 1명이라도 더 남아있는 법원 검찰청 인근에 사무실을 차려야 전관 효과를 최대한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법 시행 후에는 그 비율이 287명 중 42명(14.6%)으로 급감했다.
그럼에도 법조인 10명 중 9명은 전관예우 관행이 여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달 14일부터 이달 8일까지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소속 변호사 1101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무려 985명(89.5%)이 “전관예우 관행이 존재한다”고 답했다. “그렇지 않다”고 답한 회원은 9.8%에 불과했다. 응답자 중 712명(64.7%)은 “전관 변호사들이 수임계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우회적으로 사건을 맡아 전관예우 금지법을 피해가기 때문에 사실상 법이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답했다.
실제로 취재팀이 전관 변호사 사무실 10곳에 수임이 제한된 기관의 사건 상담을 가장해 접촉한 결과 “안 된다”고 잘라 말한 곳은 두 곳뿐이었다. 세 곳은 “가능하다”고 했고 다섯 곳은 “일단 직접 와서 상담을 받아보라”고 제안했다. 충청지역의 한 검찰청을 마지막으로 퇴임한 F 전 검사 측은 “(드러나지 않게) 손을 쓸 수 있다”며 “(의뢰인이) 실형을 받을 게 거의 확실하다면 우리 쪽에서는 문제 요소들을 최소한으로 만들어 집행유예나 벌금형이 나오도록 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법 시행 이후 갓 퇴임한 전관 변호사들이 개인 개업보다 로펌 소속을 선호하는 이유는 ‘전화 변론’이 용이하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전화 변론’은 같은 로펌에 소속된 다른 변호사의 이름으로 사건을 맡은 뒤 전화나 메신저로 예전 동료들에게 ‘잘봐 달라’고 청탁하는 것. 취재팀 분석 결과 법 시행 1년 전에는 개인 개업이 132명 중 77명(58.3%)이었지만 법 시행 후에는 287명 중 201명(70%)이 로펌행을 택했다.
:: 전관예우 ::
일본에서 1916년 퇴직 고위 관료에게 재직할 때와 같은 ‘장관’ 호칭을 계속 사용하기로 한 행정제도에서
유래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조선총독부가 쓰기 시작했고 1961년 표준국어대사전에 ‘장관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퇴임 후에도 재임 때와 같은 예우를 베푸는 일’이라는 뜻으로 처음 등재됐다. 1980, 90년대를 거치면서 ‘퇴직한
판검사가 수임한 사건을 후배인 현직 판검사가 봐주는 것’으로 취지가 변질됐다.
:: 전관예우 금지법 ::
판사나 검사로 재직했던 변호사가 퇴임하기 전 1년간 근무했던 법원 및 검찰청 등 국가기관의 사건을 퇴임한 뒤 1년간 수임할 수 없도록 제한한 변호사법 31조를 이르는 말. 2011년 5월 17일부터 시행됐다.
▼ “개업지 제한 기간 늘리고 평생 판검사제 도입 추진을” ▼
고위 공직자가 퇴임한 뒤에도 관련 업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관예우’의 원조는 법조계다. 2011년 한국행정연구원이 일반인 3414명에게 전관예우가 심한 분야를 설문조사한 결과 법조계라는 응답이 2922명(85.6%)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전문가들은 법조계의 전관예우를 근절할 시급한 대책으로 ‘수임제한 위반의 감시 강화’를 꼽았다.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결의에 따라 2007년 출범한 법조윤리협의회는 올해 1월 처음으로 변호사 1195명을 대상으로 수임제한 위반 사례를 점검했다. 그러나 변호사들이 자체 제출한 수임자료에 주로 의존해 조사해야 하는 절차상 한계 탓에 11명을 적발하는 데 그쳤다. 협의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박찬운 한양대 로스쿨 교수는 “자료 제출 의무를 강화하는 등 협의회에 더 강한 수임제한 위반 조사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로펌에 소속된 다른 변호사의 이름으로 사건을 맡고 전화나 쪽지로 현직 판검사에게 압력을 가하는 ‘전화 변론’ 등 음성적 전관예우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수임제한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미국은 판검사 출신 변호사뿐 아니라 같은 로펌에 있는 다른 변호사들도 같은 로펌이 있는 전관 변호사가 현직에 있을 때 관여했던 사건을 수임하는 데 엄격한 기준을 두고 있다. 조국 서울대 로스쿨 교수는 “현직 판검사가 전관 변호사로부터 사건 관련 전화를 받으면 그 내용을 전부 기록해 감시기관에 보고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문가들은 한 번 판검사로 임명되면 정년까지 사직하지 않도록 평생 법관제 및 검사제의 실현이 전관예우 관행의 근본 해결책이라고 입을 모았다. 일본에서 판사의 정년은 65세, 검사는 63세로 보장된다. 고위 판검사의 월수입도 대기업 임직원(50만 엔)보다 많은 120만 엔가량이라 사실상 평생법관제가 정착돼 있다. 독일도 퇴임 판검사 대다수가 변호사로 개업하지 않고 연금으로 생활하는 현실을 감안해 ‘퇴임 전 5년 사이에 근무했던 지역에는 법률사무실을 개업하지 못하게 한다’는 변호사법 조항을 2007년에 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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