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잡힌 국가재정은 한국 경제의 마지막 보루다. 오일쇼크와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등 극심한 경제위기를 넘어설 수 있었던 것도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에 비해 양호한 재정상황 덕이었다. 하지만 경제 전문가들은 이런 한국 경제의 위기탈출 전략이 더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저성장으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고 있는 데다 고령화 등으로 복지지출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나라 곳간에 생긴 구멍이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 올해 국가채무 1997년의 8.5배 수준
4일 정부에 따르면 한국의 재정건전성은 재정위기로 홍역을 치른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양호한 수준이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33.8%로 일본(219.1%) 미국(106.3%) 영국(103.9%) 등 주요국과 비교할 때 아직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한국의 재정에 이미 빨간불이 들어온 상황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국가채무의 증가 속도가 워낙 빠른 데다 복지예산이 증가하면서 재정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국가채무 증가 속도는 2000∼2012년 연평균 12.3%에 이른다. 포르투갈(10.5%) 스페인(7.4%) 그리스(6.7%) 이탈리아(3.6%) 등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남유럽 국가들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경기침체로 정부에 들어오는 세수가 부족해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다 보니 국채 발행 금액이 늘었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정부 지출이 급속히 늘면서 국가채무 증가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올해 국가채무 전망치는 518조3000억 원으로 1997년(60조3000억 원)의 8.5배 수준이다. 이에 비해 올해 GDP는 약 1410조 원으로 1997년(506조 원)의 2.8배에 불과한 상황이다. 국가채무 증가 속도가 GDP보다 3배 이상으로 빠른 것이다.
빠른 고령화 때문에 납세자의 수가 갈수록 줄어드는 데 반해 복지 수혜자들은 갈수록 늘면서 앞으로 재정 악화에 더욱 가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해 내놓은 전망에 따르면 한국이 현재의 복지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더라도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은 2020년 41.1%, 2030년에는 70.6%로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OECD는 현재 9.6%인 한국의 GDP 대비 공공사회복지 지출 비중이 OECD 평균인 22.1%로 높아지는 것으로 가정할 경우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이 2020년 46.6%, 2030년에 108.0%로 급증할 것으로 전망했다.
○ 딜레마에 빠진 재정·세제 정책
재정건전성에 빨간불이 들어온 계기는 1998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김영삼 정부 막바지였던 1997년 12.9%였던 국가채무비율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임기 마지막 해였던 2002년과 2007년 각각 18.7%와 26.9%로 높아진 뒤 2012년에는 36.5%로 크게 증가했다.
역대 정권은 균형재정을 통해 재정건전성을 회복하겠다는 목표를 여러 차례 제시했지만 매번 공염불에 그쳤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는 2014년 균형재정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내놨지만 박근혜 정부는 균형재정 달성 목표를 2017년 이후로 미뤘다.
경제위기로 나빠진 재정건전성이 쉽사리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경제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을 밑돌면서 세수(稅收)가 정부의 목표를 밑돌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균형재정과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으려는 정부의 과욕이 재정건전성 회복을 늦추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정부가 균형재정을 위해 기업과 가계의 세금 부담을 늘리는 긴축 카드와 성장률을 높여 세수를 확대하기 위한 경기부양 카드를 동시에 내놓으면서 어느 것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 1기 경제팀이 “증세는 없다”고 공언하고서도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꿔 사실상의 증세 정책을 쓴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새 경제팀 역시 경기부양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기업소득 환류세제 도입 등으로 기업의 세 부담을 늘리고 있다. 오정근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겸 건국대 특임교수는 “고령화 추세를 감안할 때 한국도 일본처럼 급격하게 재정이 악화될 소지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 선심정책-방만사업에 지방부채 100조… 지자체 78곳, 자체수입으로 월급 못줘 ▼
“지원 없으면 복지 디폴트 선언”
‘풀뿌리 민주주의’를 내건 지방자치제도가 올해로 20년을 맞은 가운데 지방자치단체들의 재정 악화는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민선(民選) 지자체장들의 각종 선심성 사업으로 혈세가 줄줄 새어나가는 가운데 복지지출마저 크게 늘어 지자체들의 곳간은 이미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다.
4일 안전행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지자체(26조1497억 원)와 지방공기업(73조9666억 원)의 부채를 합한 지방부채는 100조 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예산 기준으로 지자체의 재정수입에서 지출을 뺀 재정수지는 9조31억 원 적자였다. 서울(―1조3017억 원), 경기(―2조4535억 원) 등 17개 광역 지자체의 통합재정수지는 모두 적자를 기록했다. 재정이 취약하다 보니 전국 244개 지자체 가운데 자체 수입으로 공무원 월급도 못 주는 곳이 78개(31.9%)나 된다.
지방재정이 이처럼 악화된 것은 지자체들이 무분별하게 사업을 추진하고 방만하게 재정을 운용한 데다 경기 침체로 지방 세수가 좀처럼 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복지정책이 확대되면서 지자체들의 재정 악화가 더욱 가속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지자체들의 지출 가운데 22.3%는 복지 관련 지출이었다. 2004년 복지 지출이 11%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2배 수준으로 높아진 것이다. 최근에는 기초연금법 시행 등으로 지자체들의 부담이 더욱 커지고 있다.
한국지방세연구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박근혜 정부가 복지 확대로 135조 원의 추가 재정지출을 예상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지자체들이 부담해야 하는 지방비는 2017년까지 연평균 3조4000억∼6조9000억 원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급기야 전국 시장·군수·구청장 226명은 지난달 28일 보도 자료를 내고 “추가적인 국비 지원을 해주지 않으면 ‘복지 디폴트(지급 불능)’를 선언해 중앙정부가 추진하는 복지정책을 이행하지 않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따라 안행부는 지방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주민세와 담배소비세를 인상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정치권 및 관련 단체의 반대가 거세 국회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지자체들은 중앙정부가 복지사업처럼 선심성 정책을 추진할 때는 법을 제정해서라도 정부가 지자체와 사전에 협의를 하도록 해야 지방재정 악화를 막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중앙정부가 지자체 의견을 수렴하지도 않고 복지사업을 결정해 지자체들에 절반가량의 비용을 부담시키는 것은 문제”라며 “예산 낭비에 대한 감시도 필요하지만 지자체의 적자를 줄일 수 있도록 지방세를 확대하는 등의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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