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재정연구원 김재진 연구위원은 지난해 3월 ‘부가가치세 매입자 납부제도’라는 다소 생소한 제도를 발표했다. 현재는 소비자가 슈퍼마켓에서 1만1000원(부가세 1000원 포함)짜리 물건을 살 때 주인이 일단 전액을 갖고 있다가 반년 뒤 부가세 1000원을 세무서에 납부한다. 하지만 부가세를 납부하기 전에 슈퍼마켓이 폐업하면 세무서로선 부가세를 징수할 방법이 없어진다.
이런 점을 감안해 김 연구위원은 소비자가 1만1000원짜리 물건을 신용카드로 사는 즉시 카드회사가 부가세 1000원을 세무서에 내고 1만 원만 슈퍼마켓 주인에게 주는 식으로 제도를 개혁해 세수를 늘리자고 건의한 것이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가본 적 없는 길’을 가보자는 제안이었다.
정부는 즉각 반대했다. 자영업자들의 부가세 부담이 늘어난다는 이유였다. 당연히 걷어야 할 부가세를 쉽게 걷도록 제도를 바꾸자는 제안을 두고 세 부담 증가를 반대 이유로 내세운 정부 측 논리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많았다. 당시 조세재정연구원장으로 이 제도를 지지했던 조원동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도 청와대로 자리를 옮긴 뒤 더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 ‘가본 적 없는 길’에 대한 두려움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복지를 대폭 강화하려면 어느 정도 증세가 필요하다는 데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밀려 개혁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1980년대식 조세의 틀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시도한 중장기 조세개혁 작업은 노무현 정부 당시인 2006년이다. 아파트 관리비, 학원비 등에 부가가치세를 매기고 자영업자에 대한 세제 혜택을 줄이는 방식으로 세수를 늘려 복지 재원을 마련하려 했다. 당시 이 내용이 알려지자 사회적 저항이 커졌고 당시 정부는 수년에 걸쳐 찔끔찔끔 제도를 바꿨다. 그러다 보니 세제는 누더기로 변해 갔다.
세제가 정치논리에 휩쓸려 오락가락하는 데 대해 경제계는 혼란스러워한다. 한 대기업의 재무 담당자는 “이명박 정부가 기업의 경쟁력을 높인다며 법인세를 내리더니 현 정부는 결과적으로 법인세를 늘리는 조치를 통해 기업을 압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정책이 자주 바뀌니 기업도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기 어렵다”고 말했다.
○ 정권에 휘둘린 관료들
세제개혁이 100년 뒤를 내다보지 못한 채 초단기로 이뤄지는 이유는 세제의 큰 틀을 짜는 기획재정부 장관이 정치논리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세제를 큰 폭으로 바꾸려면 세금 문제를 총괄 지휘하는 기재부 장관이 적극적으로 정치권을 설득해야 한다. 하지만 역대 정권에서 이런 장관은 별로 없었다. 과거 세제개편 작업에 참여한 A 교수는 “역대 장관들의 면면을 보면 강만수 전 기재부 장관 같은 ‘보스형’이나 김진표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같은 ‘실무형’만 있었을 뿐 국가대계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소신형’은 찾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역대 장관들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보다 잡음을 최소화하는 데 중점을 두는 성향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국책 연구원이나 대학에 수천만 원짜리 용역을 주고 제도 개편에 필요한 논리를 개발해 달라는 정도의 조치만 취했다. 그 결과 정부 입맛에 맞는 용역보고서가 나오면 공청회를 개최했고, 비판적 여론이 일면 세제개편 계획은 없었던 일로 접고 별다른 반대가 없으면 제도 개편을 추진했다.
○ “독립된 민간 조세개혁기구 필요”
재정건전성을 높이는 일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상황에서 이제는 세제개혁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은 출산율이 낮은 데다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잠재성장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성장률이 떨어지면 세금 수입이 제대로 늘어날 수 없다. 전문가들은 조세 개혁을 5년마다 바뀌는 정부가 아닌 중립적 기구가 주도해야 한다고 본다. 정부가 중장기 조세개혁 작업을 주관하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의 방향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만큼 민간 주도의 조세개혁 기구를 만들어 정부 입김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민간 기구를 통해 소비세 확대, 법인세율 단일화 등 중장기 과제를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 근로자 36%가 소득세 한푼 안내… 면세범위 줄여 세원 확보 필요 ▼
“주식양도차익 등 과세로 전환을”
‘세금을 안 내거나 탈세·탈루하는 사람의 수를 줄여라.’
조세 전문가들은 일부 계층에 세금이 집중된 현행 세제를 다수가 공평하게 세금을 내는 구조로 개혁해야 한다고 본다. 조세저항을 줄이면서 재정건전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내려면 이른바 ‘공평 과세’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다.
우선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소득세 수입 비중은 2010년 기준 3.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2개 회원국 가운데 30위에 그치고 있다. OECD 회원국의 평균은 8.4%로 한국보다 크게 높다. 한국의 소득세 수입 비중이 낮은 것은 근로자 가운데 36%가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자이기 때문이다. 비과세 감면제도를 광범위하게 적용한 데다 감면제도를 계속 연장하면서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다.
전문가들은 면세자 비율을 줄이려면 세금을 낼 여력이 있는 사람까지 포괄하는 감면제도를 수정해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비과세인 주식양도차익을 과세로 전환하고, 채권 투자로 얻는 금융소득에 대해서도 일정 소득 이상을 얻은 사람에게는 세금을 부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한국의 GDP 대비 소득세 비중을 OECD 평균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부가가치세 세율은 10%로 OECD 평균(18.7%)보다 크게 낮지만 면세 범위는 더 넓은 편이라는 점도 문제다. 한국은 학원비나 의료서비스 가운데 세금을 면제해주는 분야가 많은데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이런 면세 범위를 줄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설학원을 과세 대상으로 전환해 늘어난 세금 수입을 공교육 활성화 대책 재원으로 활용하는 연결고리를 만드는 식이다.
세금을 고의로 내지 않는 탈세범이나 과세 대상 소득을 줄여 신고하는 탈루범을 찾아내 과세하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조세피난처와 정보교환협정을 확대해 해외에 사업장을 두고 탈세하는 기업에 대한 조사를 강화하면 대규모 세원을 확보할 수 있다. 아울러 외국자본 유치를 위해 외국인에게 줬던 세제상 혜택을 줄이는 방안도 정부는 검토하고 있다.
한편 3단계로 나뉜 법인세율을 단일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정부와 조세재정연구원 등에서 나오고 있다. 현행 법인세율은 기업의 과세 대상 이익규모에 따라 △2억 원 이하는 10% △2억 원 초과∼200억 원 이하는 20% △200억 원 초과는 22%다. 이 세율을 10%대 중후반 수준으로 단일화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대기업의 세금이 줄어드는 반면 중소기업의 세 부담이 상대적으로 늘어날 수 있어 단일세율 채택 시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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