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일본 도쿄 총리관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이곳에서 개최한 당정 정책간담회에서 5%였던 소비세 세율을 8%로 올리기로 결정하며 이같이 밝혔다. 지난해 말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227.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일본이 복지를 유지하려면 증세(增稅)는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었다.
4일 정부 등에 따르면 주요 선진국들은 복지를 늘릴 때마다 세금을 올리면서 재정건전성 유지에 심혈을 기울인다. 대기업,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부자 증세’는 물론, 모든 국민이 1원이라도 납세의 의무를 진다는 국민개세주의(國民皆稅主義) 원칙에 따라 소비세 인상 등 정치적 부담이 큰 증세정책에 대해서도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고 있다. 전문가들은 ‘복지를 늘리려면 세금을 더 내는 게 필수불가결한 일’이라는 원칙을 거스를 경우 후대에 텅 빈 나라곳간을 물려주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 복지 선진국, 증세로 재원 확보
북유럽 국가를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복지정책을 유지하거나 확대할 때 세금을 더 걷는다. 실제로 OECD 주요 회원국 중 미국 일본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나라들이 한국보다 조세부담률이 높다. 2012년 기준 한국이 20.2%에 불과한 반면 스웨덴(38.6%) 영국(28.2%) 프랑스(26.3%) 국민들은 한국보다 세금을 많이 낸다.
스웨덴은 올해 초 90억 크로나(약 1조4700억 원)의 복지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주류세(5%) 및 담뱃값 인상 △승용차 탄소세 인상 △개인연금 세금공제 축소 등의 재원마련 대책을 내놨다. 뉴질랜드는 2011년 퇴직저축에 대한 세액공제를 절반으로 줄이고 사업자가 분담하는 퇴직연금 납부분에 세금을 물리는 정책을 추진했다. 영국은 2011년 부가가치세 세율을 17.5%에서 20%로 올리면서 △소득세 최고세율 인상(40%→50%) △주세 및 자동차소비세 인상 등의 카드를 꺼냈다. 포르투갈은 2011년 재정위기를 겪으면서 부가세율을 21%에서 23%로 높였다. 그리스(19%→23%) 스페인(16%→18%) 폴란드(22%→23%) 등도 부가세를 올렸다. 간접세인 부가세를 높이는 게 안정적으로 세수를 확보할 수 있고 경제에 미치는 부작용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경제적 논리를 충실히 따랐다.
안창남 강남대 세무학과 교수는 “적어도 중간계층 이상 소득이 있는 사람에게는 많든 적든 적정한 세금을 부과해야 재정건전성이 유지된다”며 “유럽국가 수준의 복지정책을 펴려면 그들만큼 세금을 높여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 “토론과 설득으로 재정건전성 실마리 찾아”
선진국들은 정부와 정치권이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소신 있게 증세를 추진하고, 선거를 통해 유권자의 심판을 받아 책임정치를 구현한다. 이들 국가의 증세정책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무상보육 등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는 복지정책을 잇따라 시행하면서 재원마련 대책조차 내놓지 않고 있는 한국 정치권과는 분명 차이가 크다.
소비세를 올린 일본 정부가 대표적이다. 5%이던 소비세율을 15%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당초 계획보다는 크게 후퇴해 8%로 합의했지만 수차례 선거와 논쟁을 거친 끝에 정책 추진에 성공했다. 무엇보다 표를 얻는 데 도움이 안 되는 증세 카드를 정치권이 직접 꺼내들고 국민을 설득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일본 정부는 소비세 인상으로 늘어나는 세수(稅收)를 사회보장에만 쓰겠다는 주장으로 국민을 설득했다”며 “끈질긴 토론과 설득으로 국가부채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점은 한국이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범죄행위인 탈세를 막으면서 세수도 확보하는 일석이조 효과를 노리는 정책도 눈길을 끈다. 미국은 해외금융계좌 납세협력법(FATCA)을 신설해 해외에 5만 달러 이상을 보유한 납세자의 계좌정보를 미국 국세청(IRS)에 알리도록 했다. OECD 회원국들은 불법 해외 재산 은닉을 막기 위해 국가 간 해외 거주자 계좌정보를 공유하는 내용의 ‘탈세방지 협약’ 체결을 추진하고 있다.
▼ 美-日, 입법때 재원방안 마련 ‘페이고’ 원칙 효과 톡톡 ▼
각국 무분별한 재정확대 차단
주요 선진국들은 재정건전성이 나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재정을 지출할 때 세수를 동시에 확보하도록 하는 등의 ‘재정준칙’을 도입해 무분별한 재정확대를 막고 있다. 재정준칙은 재정수지, 국가채무비율, 정부차입금 규모 등 주요 재정지표에 목표치를 설정하고 이를 의무적으로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4일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재정준칙을 도입한 국가는 1990년 독일 미국 등 5개국에서 2012년 76개국으로 크게 늘었다. 재정지출이 필요한 법안이나 정책을 도입할 때 세수 확보 방안도 함께 내놓도록 하는 ‘페이고(Pay go) 원칙’이 대표적인 재정준칙으로 꼽힌다.
미국은 1990년부터 2002년까지 한시적으로 페이고 원칙을 도입해 1998∼2002년 재정흑자를 유지했지만 이 원칙이 폐지된 후 재정적자가 늘기 시작해 2009년에는 재정적자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10%에 육박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2010년 페이고 원칙을 영구법으로 부활시켰다. 특히 미 하원은 2011년 복지예산처럼 법으로 지출규모가 정해지는 의무지출을 새로 늘리기 위해서는 다른 의무지출을 줄이도록 하는 ‘컷고(Cut go)’ 원칙을 채택하기도 했다.
일본 역시 2010년 페이고 원칙을 도입했고 추가로 2013년까지 연간 재정지출 규모를 71조 엔(약 700조 원)으로 제한하는 재정준칙을 도입하기도 했다. 독일은 2009년 헌법을 개정해 균형재정 목표연도(2020년)를 명시하고 국가부채를 2016년까지 GDP의 0.35%까지 줄이도록 했다.
선심성 공약 남발로 재정건전성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공약 실현을 위한 비용을 분석해 공개하는 나라도 있다. 호주는 선거를 앞두고 재무부가 국가 재정상황을 분석한 보고서를 공개하면 정치권이 이를 참고해 공약에 따른 비용을 구체적으로 추계한 보고서를 발표하도록 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정부출연기관인 CPB가 총선 전후 정당별 공약이 재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발표하고 있다.
한국은 기획재정부가 매년 내놓는 국가재정운용계획을 통해 국가 채무를 관리하고 있지만 재정준칙이 법제화돼 있지 않아 재정 악화를 막는 효과가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새누리당이 의원입법에 대해서도 페이고 원칙을 도입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이 개정안은 아직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세종=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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